‘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석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시는 오세영 시인의 ‘열매’다. 열매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를 비롯하여 우주가 들어 있다. 모나지 않고 둥근 열매 속에는 시련의 늪을 지나온 긴 여정과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땅으로 뻗은 뿌리는 날카롭고, 하늘로 향한 가지는 뾰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씨앗이자 결과인 열매는 부드럽고 둥글어 모가 나지 않는다.

김밝은터 씨. ⓒ이복남

김밝은터(1955년생)의 한자 이름은 김명기(金明基)다. 김명기 씨는 그림을 그리면서 한자이름을 밝은터(明基)라는 우리말로 풀어 쓰고 있다.

그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이다. 어린 시절은 고성에서 지냈지만 별다른 기억은 없다고 했다. 그는 3남 2녀의 장남인데 고성에 살 때는 혼자였다. 여섯 살 때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대신동에 살았는데 동생들은 부산 와서 태어났다.

“대신동 산동네에 살았는데 부모님은 고물장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철모르던 시절이라 또래 친구들이랑 뒷산에서 주로 놀았다.

제일 작은 꼬마가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

집에는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뒷산에는 고압선 철탑이 있었다. 7살 되던 해 봄이었다. 하루는 동네 형이랑 뒷산에서 놀았다. 고압선에 연이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형이 가는 철사 줄에 돌멩이를 묶어서 저더러 던지라고 했습니다.”

고압선은 높지 않았을까?

“언덕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장난삼아 몇 번이나 돌멩이를 던졌는데 그러다가 악!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렀다. 놀란 형이 동네사람들을 불러 왔는지 어떤 아저씨의 등에 업혀 산을 내려갔던 것 같다. 정신이 들었을 때 어렴풋이 불꽃이 보였는데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감전에 의한 부상사고는 쇼크와 화상이다. 그는 어린 나이라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었고 두 팔과 두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었기에 전기가 땅으로 흐르지는 못했는지 발목 뒷부분의 근육이 전부 파열되었다. 다행히 다리는 자르지 않았지만 화상자국이 선명한 다리 뒤쪽을 그는 바지를 걷어서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며칠 만에 깨어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보수동에 있는 영국병원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손을 자르고 그 자리가 썩어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팔을 자르고……. 그러면서 병원을 여러 번 옮겨야 했다.

돈 세는 손. ⓒ김밝은터 갤러리

“집에는 돈이 없었기에 구호병원이나 자선병원 같은 무료병원에 있었습니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겠지만 팔을 너무 자르는 바람에, 어깨에서 10cm도 안 남아 갈고리 의수는 힘이 없단다. 당시 부모님의 고물상은 빈병이나 파지 등으로 형편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었는데 그의 사고로 고물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울었으나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무 어린 때라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1년 가까이 병원생활을 했다. 그리고 양 팔에 갈고리 의수를 하고 다시 서너 달 동안 다른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했다.

“의수를 하고 갈고리 집게를 사용하는 방법을 훈련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누가 어떻게 그를 치료했고 누가 그를 도와주었는지 잘 알지도 못했다. 아무튼 그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치료를 했고 경제적 지원도 받으면서 아홉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장애인이라고 다른 아이들이 놀리지는 않았을까.

“안 보는데서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놀린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는 또래 아이들 보다 나이도 한 살이 많았고 덩치도 컸다. 그리고 아이들이 갈고리 손을 무서워해서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아이들은 그가 무서워서 대놓고는 놀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중국집에서 짜장면 먹기. ⓒ이복남

필자가 어린 시절 제일 무서웠던 것이 갈고리 손을 휘젓고 다니던 상이군인이었다.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때만 해도 6.25 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들이 떼를 지어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누군가 ‘상이군인 온다!’ 하고 외치면 아이들은 무서워서 전부 숨었고 상이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금품을 요구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국가유공자 관련법이 제정되어 더 이상 거리에서 상이군인들을 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공부는 재미없었다. 갈고리 손으로는 책가방을 들 수도 없었기에 아래 여동생이나 친구들이 책가방도 들어 주었다. 갈고리 집게손은 힘이 없어서 연필을 쥘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필기는 어떻게 했을까.

“집에 와서 발가락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비뚤비뚤 못 쓰는 글씨지만 그 때부터 그의 발은 손이 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발로 글씨를 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험 때는 어쩔 수 없이 발가락으로 시험을 쳐야 했다. 어린 마음에서인지 친구들 앞에서 죽기보다 싫고 수치스러웠던 모습이었다.

체육시간에는 피구나 배구 같은 공놀이를 했는데 그는 운동장 한편에서 아이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해야 했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들이고 가난한 동네였기에 제기차기 구슬치기 등을 할 때는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놀았다. 축구는 같이 어울렸고, 야구를 할 때는 공을 던질 수는 없었기에 심판을 보기도 했다.

볼타바강 다리에서. ⓒ김밝은터 갤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안 갔습니다.”

공부도 재미가 없었지만 집에 돈도 없었기에 부모님도 그를 억지로 중학교에 보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친구들에게 발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장차 무엇이 되려고 학교도 가지 않았을까.

“학교를 다녀봤자 취직도 못 할 건데 공부는 해서 뭐하나 싶었습니다.”

철이 들면서 몇 번이나 죽고 싶었다. 그러다가 조금 나이가 들자 사람들의 손이 너무 너무 부러웠다.

“첫째는 손이 부러웠고 둘째는 세계여행이었습니다.”

두 손을 가지고 캐리어를 끌고 세계여행을 나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는 언제 한 번 저렇게 해 보나!”

그에게는 언제나 동경과 절망이 함께 했다. 두 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외국여행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저 가슴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희망도 없고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왜 절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모진 목숨이라 죽어지지 않던데요.”

그는 날마다 절망했고 날마다 좌절하며 죽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절망과 인고의 세월이었고 죽지 못해 사는 목숨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한자가 눈에 들어 왔다. 혼자서 천자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늘 天 따 地 검을 玄 누를 黃, 천자문은 선생이 없어도 혼자서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천자문 펜글씨를 연습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