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수화강의를 하고 수화비디오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청각장애인 A씨가 운전하는 차에 비장애인 B씨가 약간 다쳤다. 사고는 경미했지만 A씨에게 면허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B씨가 턱없는 보상금을 요구하며 병원에 드러누웠던 것이다.

노선영 씨 가족. ⓒ이복남

A씨가 너무나 억울하다며 찾아 온 곳이 당시 필자가 일하고 있던 부산장총이었다. 필자는 교통사고 전문가와 A씨, 그리고 강주수 수화통역사와 같이 병원으로 B씨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했다. A씨가 무면허 운전인 것은 필기시험을 20여 차례나 치르고도 시험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번번이 낙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남부운전면허시험장에서 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수화강의를 하고 부산장총에서도 관계기관에 여러 차례 건의를 하여 1996년 가을부터 수화 비디오로 필기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강주수 수화통역사에 의하면 운전면허 필기시험 수화비디오에 나오는 문장의 단어들이 수화통역사마다 다르게 표현하여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비디오를 보고는 더 헷갈려서 3~4회 실시 후에 수화비디오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당시 1종 운전면허는 80점이고 2종 면허는 70점이었는데, 1999년 5월부터 1종은 70점, 2종은 60점으로 완화되었다.

강주수 수화통역사는 그 때를 회상하며 남부운전면허시험장 안문웅 장장이 너무너무 고답다면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필자가 알아 본 결과 안문웅 장장은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아무튼 노선영 씨는 수화가 아닌 일반 필기시험으로 합격했으나 실기 연습을 몰래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이미 아버지 차를 운전하고 있었기에 남편에게만 이야기를 하고 운전학원에 등록을 했다.

“밖에 돌아다닌다고 시어머니가 어찌나 구박을 하든지 결국 포기했습니다.”

청인과 농인은 어떻게 싸울까. 수화를 할 줄 아는 농인들 끼리 싸울 때는 서로 빠르게 수화를 하면서 아~~~ 또는 어~~~ 등의 괴성을 지르면서 싸운단다. 농인하고 청인이 싸울 때도 농인은 수화를 하면서 아~~~ 또는 어~~~ 등의 괴성을 지르고 청인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싸운다는데 물론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잘 모른단다. 격한 감정과 표정으로 짐작할 뿐이고. 노선영 씨도 가끔은 시어머니와 그렇게 싸웠단다.

노선영 씨 보청기. ⓒ이복남

시집살이 11년 만에 분가를 했고 부산남부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새로 필기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리고 운전학원에서 실기시험을 치고 도로연수도 받았다. 현재 노선영 씨는 운전을 하는데 어려움은 없을까.

“들리지 않으니까 클랙슨 소리를 못 들으니까 양쪽 옆을 조심하면서 운전을 합니다.”

처음 면허증을 받고 연수를 할 즈음에 시동생에게 차가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그 차를 그녀에게 주겠다고 해 놓고 차일피일 약속을 안 지켰다. 그래서 중고차를 한 대 샀다.

“시어머니가 차 샀다고 뭐라고 해서 어머니가 약속을 안 지켜서 샀다고 했습니다.”

애들은 커 가는데 생활비는 언제나 쪼들렸다. 시어머니도 그녀에게는 돈을 잘 주지 않았고 남편은 적금을 넣는다며 돈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돈 벌 궁리를 했다. 마침 농아들의 빵장사가 유행하고 있었다. 사상역 부근에서 그녀도 빵장사를 시작했다. 방과 후에는 큰딸과 작은딸이 가게에 나와서 그녀를 도왔다.

아이들이 엄마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을까.

“아이들이 빵도 굽고 손님이 오면 빵을 팔면서 우리엄마라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가 할머니에게 구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아이들이 엄마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도 더 이상은 며느리를 구박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그런대로 공부를 잘 했다. 큰딸이 대학을 졸업하고는 금융계통에서 일을 했는데 영국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그녀에게 큰딸의 유학비용은 없었다.

“엄마 걱정 마세요. 할머니에게서 받아 낼 테니까요.”

큰딸이 할머니에게 뭐라고 했는지 시어머니는 큰딸의 유학비용을 내 놓았고 큰딸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몇 년 있다가 작은딸도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그녀가 작은딸에게 물었다.

“유학 가서 뭐할 거냐?”

작은딸은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패션디자인! 그것은 이 엄마의 어릴 때 꿈이었다.”

작은딸은 몰랐다며 엄마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작은딸도 유학비용은 할머니에게 받아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큰딸과 작은딸이 다른 지역에 사는데 둘 다 영국에 삽니다.”

딸 둘은 유학을 갔고,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현재 대학을 다니고 있다. 아이들이 수화는 할 줄 알까. 큰딸, 작은딸, 큰아들은 엄마 아빠와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레 익힌 수화인데 작은 아들은 대학에 다니면서 수화동아리에서 수화를 정식으로 배운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하고는 대화가 잘 됩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자란 것 같은데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노선영 씨 부부. ⓒ이복남

남편은 아직도 시아버지와 함께 목수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보청기 회사에 근무하는데 청각장애인들에게 보청기 보급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틈틈이 청각장애인들에게 목수 등 일자리를 주선하고 있다.

“우리 집에는 농인들이 자주 옵니다.”

처음에는 필자도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청각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있었다. 청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올까?

“농인들끼리는 다 통합니다.”

그래서 서울 등 다른 지방 농인은 물론이고 몽골이나 동남아 등 외국에서 오는 농인들도 부산에서는 그의 집에서 묵고 있단다.

그녀는 현재 37평 빌라에 살고 있는데 마당에는 텃밭도 있어서 채소를 가꾸기도 한단다. 딸 둘이 외국에 나가 있고 큰아들은 서울에 있고 집에는 그녀와 남편과 작은아들 셋뿐이라서 집이 텅 비었단다.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이란 잠을 잘 수 있는 소파를 의미하는 카우치(Couch)와 파도를 타다는 서핑(Surfing)의 합성어로 여행자들을 위한 비영리 커뮤니티다. 2004년 미국 보스턴의 한 대학생이 시작했다는데 일종의 ‘숙소 품앗이’다. 노선영 씨가 카우치 서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일종의 카우치 서핑이다.

“애들 학비는 시어머니가 해 주시고, 내가 필요한 돈은 내가 벌어서 씁니다.”

자녀들 네 명 다 결혼 시킬 돈은 남편이 적금 든 게 있으므로 걱정하지 않는단다.

“한 때는 왜 나만 이런가 싶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밤바다 옥상에 올라가서 혼자 울었는데, 생각하면 그것도 다 지난 일이란다. 지금도 약간의 후원금을 외국에도 보내고 있는데 여생은 아픈 사람이나 힘든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고 싶단다.

“제가 어렵게 커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노선영 씨, 그 소망 꼭 이루시기를. <끝>

*노선영 씨 인터뷰는 강주수 수화통역사가 통역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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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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