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하구에는 을숙도가 있는데 을숙도(乙淑島)라는 이름은 새 을(乙)과 맑을 숙(淑)으로 새가 많고 물이 맑은 섬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을숙도 갈대와 건너편 명지까지 파밭으로 채워졌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 각종 물고기와 조개 등이 많아 철새의 서식지이기도 했다.

식당에서. ⓒ이복남

그의 집은 을숙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횟집을 운영했다. 그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공부는 별로여서 고등학교는 생각도 안 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친구 분이 그래도 학교는 보내야 된다고 하는 바람에 정규학교가 아닌 괴정에 있는 모 기술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했다.

그 즈음 횟집을 접고 을숙도를 나가야 했으니 낙동강 하굿둑 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낙동강 하굿둑은 바다로 부터의 염수(鹽水)가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구부에 쌓은 둑으로 염해방지 뿐 아니라 낙동강 하류의 생활이나 농업·공업용수 확보를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환경단체 등에서 생태계 파괴를 들어 반대를 하는 바람에 차일피일 하던 것이 드디어 결정된 것이다.

그의 집은 을숙도에서 나가는 보상금으로 하단에 아파트 하나를 구입하고, 아버지는 다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큰 형은 공장에 다녔고 중학교를 졸업한 작은형이 아버지를 도와 배를 탔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나 전자기기 자격증은 취득했다.

세월이 변했다. 부모님 시절에는 고기를 잡아도 가난을 면치 못했으나, 작은형이 배를 타면서 생선이나 재첩 값도 올랐다. 그리고 부모님 때 보다는 많이 잡았기에 돈이 되었다. 그도 졸업을 하자 취직을 하지 않고 작은형을 따라서 배를 탔다.

봄이면 숭어와 도다리를 잡았는데 하루 밤에 몇 십만 원을 벌기도 했다.

“홍수가 나면 사람들은 배를 쉬었는데 우리는 오히려 배를 탔습니다. 숭어는 물이 흐려야 잘 잡히거든요.”

배에 모터를 달았으나 노를 젓기도 했다. 숭어는 저녁 해가 떨어지기 전에 그물을 쳐 놓고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걷었다.

육수장망 어로기법. ⓒ네이버 지식백과

“육수장망이라고 아십니까?”

육수장망(陸水張網)이란 낙동강 하구 즉 가덕도 등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어로기법인데 육지의 높은 곳에서 망잽이가 바다를 보고 있다가 숭어 떼가 지나는 것을 보고 신호를 보내면 바다에서 기다리던 배들이 그물 쳐서 잡는 방법이다. 숭어는 물에서 펄쩍펄쩍 뛰어 오르는 습성이 있으므로 멀리서도 망잽이가 숭어 떼를 발견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망둥어도 뛰는 습성이 있어서 ‘숭어가 뛰니까 망둥어도 뛴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숭어 철에는 육수장망으로 숭어를 잡기도 했고, 그리고 대부분은 재첩을 잡았다. 재첩도 낙동강 하구에 그물을 쳐 놓았다가 기계로 그물을 끌어 올렸다. 몇 년 동안 작은형과 고기도 잡고 재첩을 잡아서 제법 돈을 벌었고 그래서 5톤 정도 하는 배를 4척이나 가졌다.

“부모님이 배를 안타도 우리는 제법 부자였습니다.”

낙동강 하굿둑 공사를 하는 동안은 고기가 잘 잡혔고 재첩도 많이 잡았다. 그런데 하굿둑 공사가 마무리 되어 가면서 점점 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재첩은 빈껍데기가 많았다. 바닷물과 강물의 교류가 안 되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고기잡이는 나가야 했다.

어느 해 봄 새벽에 작은형과 같이 재첩을 잡으러 나갔다. 그와 작은형은 각각의 배를 타고 그물을 쳤다가 기계로 그물을 끌어 올렸다. 그가 그물을 다 끌어 올리고 저 만치에서 작업하던 작은형을 바라보니 빈 배만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요즘 같이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행님아, 어데 갔노!” 몇 번이나 고함을 쳤으나 작은형은 대답이 없었다.

“처음에는 형이 장난치는 줄 알고 가까이 가 보니 배에는 형이 없었고, 끌어 올리던 그물은 터져 있어서 사고가 났구나 싶었습니다.”

근처를 아무도 돌아보아도 작은형은 보이지 않아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작은형이 물에 빠진 모양입니다.”

당시 아버지가 하단 어촌계에서 일을 보고 있었기에 배 몇 척이 서둘러 작은형을 찾으러 나갔으나 찾지를 못했다.

“그래서 머구리를 몇 사람 사서 바다 속을 훑기도 했으나 작은형은 찾지 못했습니다.”

머구리는 일본어 모구리(もぐり)에서 온 경상도 말인데 예전의 잠수부다. 며칠을 찾아도 작은형은 찾지 못해 포기하다시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장림 사람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형을 봤다고 했다. 하단 어촌계에서 서둘러 바다로 나갔는데 작은 형은 물에 빠진 그 자리에 1주일이 지나서야 시체로 떠올랐던 것이다.

“머구리들이 사흘을 찾았는데도 못 찾더니만 그 자리에 떠올랐답니다.”

부모님이 그에게는 작은형의 시신도 못 보게 했고, 4척의 배도 모두 팔았다. 그도 다시는 배를 타고 싶지 않았기에 부모님이 배를 팔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작은형의 죽음은 하굿둑 때문입니다. 당시 하굿둑 물길만 안 막았으면 내 인생은 어떠했을까, 장애인이 아닌 평범한 인생이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듭니다.”

낙동강 하굿둑은 1987년에 완공되었다. 강물과 바닷물이 소통을 못하게 되자 어패류와 철새의 감소 등 생태계 파괴로 시민단체 등에서 줄기차게 하굿둑 개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부산시에서도 하굿둑 개방에 대한 용역 등 여론 수렴중이라고 한다.

“재첩을 잡아도 살아있는 재첩이 아니라 뻘(개펄)만 가득 들어 있어 그물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터진 겁니다. 물은 흘러야 되는데 막으면 안 됩니다.”

이철우 씨는 지금도 작은형의 죽음을 원통해 했다.

“그날 이후로 재첩국도 안 먹습니다.”

광주 빛고을대회에서. ⓒ이복남

취직을 하려고 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옛날에 공부를 좀 할 걸, 후회가 되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여기저기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노가다를 했는데 저녁마다 친구들이 불러내서 술을 마셨다.

“친구들이 저를 불러내서는 술값을 내게 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불려나간 술집에서 더 이상은 술값을 못 내겠다고 했다가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친구들이랑 경찰서에 잡혀가 3일간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 친구들 다시는 안 만납니다.”

그러다가 진영에서 철도차량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철도차량의 하청업체였다.

그 무렵 아내 정희정(1972년생) 씨를 만났다. 정희정 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정희정 씨는

부산 반여동에 있는 대우실업에 다니고 있었는데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어 경주에 있는 집에 갔다.

“일요일 오후 부산 내러오는 길에 엄마하고 언니하고 결혼예물을 맞추러 갔어요.”

경주 시내 금은방에서 언니의 반지 목걸이 등 예물을 맞추는데 금은방 주인아주머니가 정희정 씨를 맘에 들어 하면서 부산에 조카가 하나 있는데 한 번 만나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부산 온천장에서 저 사람(이철우)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철우 씨가 퇴근 후에 기숙사 사감실로 전화를 하면 마이크로 사람을 불렀고, 그러면 기숙사 입구에 있는 전화기로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는데 웬일인지 통화가 잘 되었다. 보통은 전화가 잘 안 되었는데 인연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삐삐 시대인데 삐삐가 오면 공중전화로 일요일이나 퇴근 후에 약속을 잡기도 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겠지요.”

그렇다면 이철우 씨는 정희정 씨의 어디가 좋았을까.

“고모한테서 소개를 받았는데 수수하고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철우 씨는 화장품 냄새가 싫다고 했다.

“엄마가 화장을 진하게 해서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안 가고 할머니하고 잤습니다.”

그런데 정희정 씨가 화장을 별로 안 했던 것이다. 이철우 씨는 차가 있었기에 토요일 저녁이면 정희정 씨를 경주 집까지 데려다 주고, 그는 고모 집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정희정 씨를 반여동 대우실업까지 데려다 주고 그는 진영으로 갔다.

“돈을 길에다 다 뿌리는 것 같아서 빨리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아내와 바닷가에서. ⓒ이복남

그런데 어머니가 반대를 했다. 정희정 씨가 싫어서라기보다는 큰형도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동생이 먼저 결혼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96년 5월에 결혼을 하고 김해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아내 정희정 씨는 집 근처 조그만 가내공장에 일을 하러 다녔는데 딸이 태어났다. 딸이 세살 때 아내는 회사를 그만 두고 하단 시댁으로 합가를 했다. 이철우 씨가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진영공장에 다니면서 보니까 철도차량 부품공장을 잘만 하면 돈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전세보증금까지 빼서 큰형과 제매와 함께 철도 차량부품 하청공장을 설립했다.

하단 시댁은 36평 아파트라 대가족이 살아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아내 정희정 씨는 딸아이를 데리고 시집살이를 했다.

“시댁에는 시할머니 시부모 시숙 그리고 시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IMF가 오는 바람에 사업이 망했다. 하는 수 없이 하단 아파트를 팔아 빚을 청산하고 강서구 강동동으로 이사를 했다.

“몇 달을 놀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녔습니다.”

봄에 모심기가 끝나고 나면 논에는 미꾸라지가 살았다. 밤에 농수로에 통발을 설치하고 아침이면 걷으러 갔는데 밤사이에 미꾸라지가 통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던 것이다.

“아는 형님 하고 같이 다녔는데 논 주인들이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미꾸라지가 제법 돈은 되었기에 부지런히 다녔는데 가을에 벼를 베고 나면 미꾸라지는 사라졌다. 미꾸라지도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진흙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미꾸라지를 잡고 겨울에는 노가다를 다니면서 2년 쯤 그 일을 했습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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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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