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세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 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의 ‘또 다른 고향’이다. 윤동주는 우리 민족이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시절의 시인이다. 시인은 시대적으로 절망적이고 괴로움을 느끼는 어둠의 세계에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고향으로 가고자 했다. 핍박 받는 백골이 누워있는 어두운 방에서 밝고 넓은 초현실의 또 다른 고향 우주로 향하려는 동경을 노래하고 있다.

윤병용 씨. ⓒ이복남

윤병용 씨는 윤동주 시인과는 또 다른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며 어둠에서 살았으나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시대의 아픔인 줄조차 몰랐다. 그리고 청장년이 되어서는 현실이 너무 암울해서 다른 것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知天命)이 되어서야 겨우 그 아픔의 실체를 알아채고 통곡했다. 어릴 때는 참으로 암울했던 어둠속을 헤맸고, 지금 물리적으로 눈을 감고서야 그 어둠속에서 비로소 빛을 보고 있다.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했던가.

윤병용(1949년생) 씨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가 고향이다. 수주면은 주천강을 감싸고도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인데 설구산 동쪽을 ‘무릉리’ 그리고 서쪽을 ‘도원리’라고 불렀다. 현재는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바뀌었다. 무릉도원은 도연명의 도화연기에 나오는 이상낙원이다. 당시 윤병용 씨 하고는 무관하지만 영월에는 유명한 동강도 있고 무엇보다도 단종과 김삿갓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윤병용 씨가 태어나서 그가 살던 고향은 무릉도원은커녕 지지리도 못 먹고 못살던 시절의 첩첩산중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산후풍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유기그릇을 만들었다는데 아버지가 아내의 죽음에 절망하던 차에 6.25가 터졌다. 어린 아들은 장모에게 맡기고 아버지는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1951년 10월 아버지는 포천전투에서 전사했다.

윤병용 씨는 너무 어린 나이라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의 전사도 모른 채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 무렵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아버지 전사 통지서가 왔는데 글자를 모르니까 아버지가 오신다고 껑충껑충 뛰며 좋아 했답니다.”

그 때 이웃의 형이 하는 말이 “야 임마, 그건 네 아버지가 온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었다는 전사통지서야.”라고 알려 주더란다.

당시만 해도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의 죽음을 애통해 할 줄도 몰랐고, 그 곳이 무릉도원인 줄도 몰랐다. 날이 새면 동네 또래들과 계곡에서 미꾸라지와 송사리도 잡으며 천방지축으로 뛰어 놀았고 밤이 되면 집으로 들어와 할머니와 함께 잤다. 할머니는 부자 일가의 방앗간 일을 봐 주고 있었다.

그는 할머니와 그럭저럭 살았는데 그가 아홉 살 되던 섣달 그믐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그를 법흥리에 사는 이모가 데려 갔다. 특별히 구박이라고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이모집에서 그는 머슴이었다.

이웃에 점방이 하나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사탕이 어찌나 먹고 싶었든지 사탕 한 알을 몰래 훔쳐 먹었다가 주인아저씨에게 뒈지게 얻어맞았다.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구르기도 하는 등 10살 어린 나이의 일 년은 그야말로 서러움과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베리의 산딸기 마을. ⓒ이복남

그렇게 1년 쯤 지난 어느 날, 큰아버지가 찾아 왔다. 아버지의 보상금이 나왔던 모양이다. 큰아버지는 그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그와 함께 큰아버지 집이 있는 평창 대하리로 갔다.

“큰 고개를 넘고 넘어 하루 종일 걸었습니다.”

송아지를 끌고 가는 큰아버지를 뒤를 괴나리봇짐을 지고 타박타박 따라 갔다. 큰아버지집도 잘 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촌들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학교에 가 보지 못했다.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출생신고부터 했다. 그의 나이는 쥐띠라고 알고 있었는데 출생신고는 49년생으로 되어 있었다.

“글은 몰랐지만 산수는 잘 했습니다.”

큰아버지 집도 산골이라 11살이 된 그는 평창국민학교 대창분교 3학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2학년에서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한 아이들을 따라 갈 수는 없었다.

“집에 오면 일도 하고 꼴도 베서 소를 먹여야 했습니다.”

누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형은 군인이었고. 집에는 동생 둘이 있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이 공부를 잘 했다.

“그 무렵 형이 휴가를 나오면 큰어머니는 하얀 쌀밥에 가운데를 파서 노란 계란 하나를 얹어 주는데 그게 어찌나 부럽고 먹고 싶든지…….”

나중에 계란 하나를 몰래 먹었다가 큰어머니께 얻어맞고 혼이 났다. 그는 언제나 춥고 배가 고팠다.

“비가 오면 감나무나 배나무 밑으로 달려갔습니다.”

윤병용 씨는 옛시절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데 배고픔과 비와 감나무는 과연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세상에나! 비바람에 감이나 배가 떨어질 새라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것이다.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졸업은 해야 중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멋모르는 사촌동생은 “공부도 못하는 형은 중학교에 보내주고 나는 왜 중학교에 못 가라 하느냐”며 울며불며 큰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그는 유자녀라 학비가 들지 않았음을 그 때는 그도 사촌동생도 알지 못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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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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