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이 시는 김소월의 ‘먼 후일’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영원성을 욕망한다. 그 영원한 욕망이 사랑이라고 해도. 그러나 세상에 영원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그리워하다가 먼 훗날에는 혹시라도 잊을지도 모르지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당신을 잊을 수 없다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번 달에 만난 사람은 청각장애 2급의 일본인 에리구치 테츠지(江里口 哲司) 씨다. 에리구치 씨를 만나고 나서 그의 삶을 쓰려고 하니 떠오르는 시가 김소월의 ‘먼 후일’이었다. 그러나 에리구치 씨가 잊지 못하는 것은 가슴 절절한 사랑이 아니다. 부모자식 간의 이별이나 애끓는 정도 아니다.

에리구치 씨가 가슴을 치며 못 잊어하는 것은 돈이었다. 그는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에다 먼 후일의 장애인복지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빚까지 얻어서 빌려 주었는데 그는 돌려받지 못했다.

처음 돈을 줄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을까. “몇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어찌나 거창하든지 그야말로 감언이설에 속았습니다.”

필자는 일본어를 모른다. 일본 수화는 더 모른다. 그래서 필자가 에리구치 씨를 만날 때는 두 사람의 통역이 필요했다. 에리구치 씨의 일본 수화를 한국 수화로 통역해 주는 사람, 그리고 한국 수화를 말로 통역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년 여름 한국 수화통역사가 에리구치 씨 관련 서류를 들고 필자를 찾아 왔다. 일본 농인인데 한국 농인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다고 했다. 서류를 훑어보니 사기는 무혐의가 되고 빌린 돈을 갚겠다는 지불각서를 **법무법인 이름으로 작성했으나 날짜가 지났지만 돈을 갚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갚겠다는 돈이 일본 돈으로 2,850만 엔(円)이나 되었다. 그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는데 변호사 비용만 275만 엔이나 지불했다며 더 억울해 한다고 했다.

필자가 **법무법인에도 문의를 하는 등 여러 군데 알아보았으나 에리구치 씨가 돈을 받을 승산은 별로 없어 보였다. 수화통역사에게 그 말을 전하니 가슴에 맺힌 한이라도 풀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지난 연말을 맞아 에리구치 씨가 직장에 휴가를 내어 관련 서류들을 들고 필자를 찾아 왔다.

에리구치(1966년생) 씨는 일본 후쿠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근처 중학교 수학 선생이었고 어머니는 농아학교 유치부 선생이었다. “누나가 한명 있는데 누나도 농인입니다.” 부모님은 누나의 청각장애 원인도 모른 체 6년 만에 동생이 태어났고 부모님은 누나 때문에 노심초사 했으나 동생역시 청각장애인이었다.

“누나가 농아라서 부모님이 제가 농아라는 것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발견했답니다.”

부모님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 갔으나 의사는 선천성 난청이라고 했다. 당시 풍진이 유행해서 그 또래에 농아들이 많이 태어났다고는 알고 있지만 그와 누나가 왜 농아가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가 농아학교 선생이라 누나와 그의 청각장애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여느 아이들처럼 키웠다.

“부모님이 저희들을 위해서 농아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누나는 후쿠오카 고쿠라 농아학교(福岡県立小倉聴覚特別支援学校)를 다녔는데, 그도 누나를 따라 유치부를 다녔다. 그러나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다른 아이들보다 받아들이는 정보가 늦은 모양이었다.

“집에 오면 동네 아이들은 뛰어 노는데 부모님은 누나와 저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 때는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이 부러워도 참아야 했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모형 장난감 같은 것을 많이 사 주셨는데 특히 비행기 프라모델을 자주 사 주셨다. 그는 비행기 프라모델을 가지고 놀았고 비행기 그림도 잘 그렸다.

“덕분에 비행기를 좋아해서 장래 희망은 파일럿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서 파일럿이 되려면 비행기 조종사 면허와 무선전화 면허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농아인이라 무선전화가 불가능해서 파일럿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농아학교에서의 공부는 구화중심이고 언어훈련도 많이 해서 귀는 들리지 않지만 어느 정도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어머니의 노력 덕분이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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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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