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기어 다녔는데 서너 살부터는 걸어 다녔습니다.”

그가 서너 살 무렵 시골마을이라면 대부분이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그런데 그는 검정고무신을 신을 수가 없었다. 고무신은 발가락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의 발은 고무신이 감싸고 덮어야 할 발가락이 없었던 것이다.

아내 서현자 씨와 외도 여행. ⓒ이복남

“형과 누나에게는 고무신을 신겼고 그래도 저에게는 발등을 덮는 운동화를 사주셨어요.”

당시로서는 검정고무신에 비해 몇 배 비싼 고급운동화였지만, 그 비싼 운동화가 그에게는 어머니의 미안함이 더해진 일종의 자립재활기구였다. 그는 운동화 앞부분에 솜을 뭉쳐 넣고 고무줄로 묶어서 뒤뚱뒤뚱 걸었다. 물론 달리지는 못했고 똑바로 걷을 수도 없었다.

“여천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친구들도 특별히 저를 놀리지는 않았습니다.”

뛰고 걷는 운동은 잘 못했지만 팔로 하는 권투 같은 것은 해 보았다. 그래도 다리에 버티는 힘이 없으니 잘 하지는 못했고, 공부는 그럭저럭 했기에 특별하지 않은 그저 조용한 아이로 지냈다.

그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는데 어머니는 평생 그에게는 죄인이었다. 그래서인지 형이나 누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부모님을 거들어 농사를 지었다. 주로 고추 콩 그리고 담배 농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농사를 짓지 않았고 단양읍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단양중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고등학교를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공부도 별로 재미가 없었고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자니 아버지가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마침 음성직업훈련소에서 훈련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자동차 정비과 6개월을 수료하고 제천의 자동차 정비공장에도 6개월 쯤 다녔다.

“그 때는 일종의 국가장려정책이라 어쩔 수 없이 다녔습니다.”

자동차 정비가 국가장려사업이라니? 필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농촌의 발전을 위한 농기구 수리사업을 위해서란다. 그래서 정말하기 싫었지만 하는 수 없이 자동차 정비를 배워 어느 카센터에서 일을 했다. 하다 보니 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카센타에서 빵구라시(펑크 때우기)를 했는데 통금에 특혜가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통금이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타이어 펑크를 때우고 수리하는 카센터 직원들은 통행금지가 없었다. 12시가 지난 통금 시간에 검문을 당해도 통과 통행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얼마나 신이 나든지 그 재미에 카센타에 다녔습니다.”

12시가 넘어서 경찰이 붙잡아도 통행금지 통과증이 있었던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에 그렇게 우쭐거리면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다.

“징병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면제판정을 받았습니다.”

징병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카센터를 그만두었기에 다시 갈 수도 없었다. 이제 뭘 해야 되나, 다시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작은 형이 친구가 부산에서 신발공장에 다니는데 관심 있으면 가보라고 했다. 신발공장?

장애인단체에서 청와대 견학. ⓒ이복남

“사실 신발공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냥 집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을 향해 버스를 타고 기차로 갈아타고 물어물어 그 형을 찾아 갔다. 그 형은 당감동에 있는 고무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것이 직업이 되고 말았단다.

“그 형을 만나서 처음 면접을 보러 갔는데 장애인이라고 안 된다고 합디다.”

장애인이라는 말도 나중에 알게 된 말이었단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도 장애로 인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로인해 차별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정비공장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데없이 장애 때문에 채용할 수 없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손에는 이상이 없어서 일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요?”

신발공장은 두 손으로 일을 하고 손에는 이상이 없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느냐고 볼멘소리로 항의를 했더니 비상시에 탈출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처음으로 당하는 일이라 서럽기만 했다. 아마도 큰 회사라 조건이 까다로웠던 모양이리라.

물론 장애인복지법도 고용공단도 없던 시절이었다. 하는 수 없이 처음 가려던 큰 회사는 포기하고, 형 친구는 근처에 있는 작은 회사를 소개했다. 당시만 해도 신발산업은 호황이라 당감동이나 사상일대는 크고 작은 신발공장이 많았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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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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