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이 되었다. 그는 중앙대학교 정외과를 목표로 공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급 임원을 하는 등 통솔력은 인정받았기에 고등학교 때도 반장 또는 부반장을 했다. 고3 때 친구 A가 전교 회장을 하고 그가 대대장을 했다. A와 그는 나중에 정치가가 되어 다시 만나자고 손가락을 걸고 장래를 약속했다.

어여쁜 신랑신부. ⓒ이복남

“A는 교대를 나와서 학교 선생을 하다가 나중에 교육감 선거에서 떨어지자 그 쇼크로 죽었습니다.”

정외과를 목표로 했던 그는 대학을 가지 못했고 정치가도 되지 못했다.

“생각하면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3학년 대대장이었는데 2학년 임원이었던 여학생 B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는 B와 아무도 몰래 사랑을 키웠는데 졸업이 다가오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B는 괘 유명한 집의 딸이었는데 B의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B의 아버지에게 불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당장 부모님을 데려 오라고 했다. B의 집을 나서는데 눈앞이 깜깜했다. B와의 사랑은커녕 부모님을 불러 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으니, 이 일을 부모님이 아시면 뭐라고 할까.

가족사진. ⓒ이복남

눈물이 앞을 가려 무작정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느 담벼락에 붙은 포스터에 눈길이 갔다. “육군 지원병 모집” 대학이고 뭐고 당장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길로 병무청에 가서 육군에 지원했다. 입영날짜가 다가오자 할머니께 말씀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매, 지 내일 군대 갑니데이.”

“아이고 내는 그런 줄도 모리고 밥을 묵고 있었데이.”

할머니는 장손이 군에 가는 줄도 모른 채 밥을 먹었다면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는 창원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3육군병원 장비계에서 복무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대학에 가려니 너무나 막막했다. 까짓것 대학 안 가면 어때, 마침 철도청에 임시직 자리가 났다. 1년 쯤 지나자 정직원으로 발령이 났고 철도차량 정비창 자재과에세 근무를 했다.

“직장에 나가면서 결혼을 했습니다.”

B가 결혼 했다는 소리에 오기가 생던 것이다. 마침 학생회 활동할 때 알던 지인의 소개로 김금자(1947년생) 씨를 만났다. 그는 김해 김 씨이고 김금자 씨는 경주 김 씨였다. 결혼을 하고 아들하나, 딸 하나를 낳았고 아내는 집안 살림을 했다.

철도차량정비창 자재과는 철도에 필요한 모든 부품 및 자재를 구매하고, 피스톤, 엔진, 발전기, 볼트와 너트 등을 신청자에게 반출하였다. 그러면서 철도노조 지부장을 맡기도 했었다. 할일도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고 날마다 과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가슴이 뻐근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 가니까 협심증 초기라며 조심하라고 했다.

김성득 씨의 일상. ⓒ이복남

“몸도 좀 안 좋고, 정치가의 꿈도 버리지 못해서 명퇴를 했습니다.”

당시 해운대지역 국회의원은 민주자유당의 김운환 의원인데 김운환 의원의 후원회와 조직 관리를 담당했다. 한편 그동안 무엇을 향해 달려 왔던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다시 대학을 가기도 뭣하고 해서 부산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제가 장애인을 처음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C장애인단체에서 안동하회마을로 나들이를 가는데 김운환 후원회 사무국장으로서 동승했던 것이다. 목발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간신히 버스에 오르기는 했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은 봉사자들이 업어서 태웠고, 사지가 뒤틀린 뇌성마비도 있었다. 버스는 경주로 향해 가는데 장애인을 처음 보니 미칠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 후원회 사무국장인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경주에서 정차하면 내려야지.

“만감이 교차했지만 차마 경주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우거지상을 하고 안동에 도착했고 마침 그에게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배당되었다. 그 장애인의 휠체어를 밀며 하회마을을 돌아보는데, 그 장애인은 전기기사였는데 감전사고로 다리를 다친 산재장애인이었다.

“아하, 이 사람도 예전에는 잘 나가던 기사였구나, 그래서 산재장애인이 되었구나.”

그 장애인과 이러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경주에서 내리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날 이후 민주산악회 해운대 지부를 구성하고 울산향우회와 대학동문회를 결성하는 등 후원회와 조직 관리를 위해서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 다녔다.

1999년 10월 초였다. 한 친구와 차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차안에서 졸도를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동아대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처음 응급실에 왔을 때는 담당의사는 가망이 없겠다며 가족들에게 연락하라고 했단다.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아들과 딸이 왔는데 그의 임종을 지키려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는 나름대로의 응급처치를 했고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 그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정신이 들고 보니 옆자리의 벽에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래프가 보였는데 물결 같은 그래프가 쭉 한 줄로 가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곡소리가 났다. 나도 이제 저리 되겠구나. 장남은 결혼을 시켰지만 둘째 딸은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이렇게 죽어야 하다니.

“그 때만 해도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