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년 후에 재혼을 하셨는데 그 대궐 같은 집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새어머니는 그 보다는 5살이 많은 여자였는데 아버지는 집을 팔고 새어머니와 다른 데로 이사를 했다. 어찌어찌 학교는 졸업했으나 배우의 길은 너무 멀었고 그는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해병대 현역시절(좌) 해병전우회(우). ⓒ이복남

“합판공장에 입사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데 그의 이력서를 보던 면접관 하는 말이 ‘날아다니는 새가 갇힌 새가 되려하느냐’고 했다. 어쨌거나 발령은 났지만 면접관의 말처럼 합판공장에 갇혀 지내자니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한 달도 채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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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친구의 삼촌이 식당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와 같이 가끔 그 식당에서 밥을 먹곤 했는데 삼촌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가 절망에 빠졌을 때 삼촌의 딸 즉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 그를 위로해 주기도 했었다.

그는 합판공장을 그만두고 혼자 여관에서 술독에 빠져서 울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사촌 여동생을 불렀는데 그가 불쌍해 보였는지 여관까지 와주었다. 사랑이었을까. 그는 꺼이꺼이 울었고 여자는 우는 그를 위로하며 달래 주었다.

“우리 달아나자”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친구의 사촌 여동생 변00(57년생) 씨도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그를 따라 나셨다. 이를테면 식구들 몰래 도망 나온 야반도주였다. 친구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변00 씨를 데리고 마산으로 갔다.

“마산에서 방을 하나 잡아 놓고 아는 사람을 통해서 도서 세일즈맨으로 일했습니다.”

도서는 전집류와 아동도서를 취급했다. 그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지만 세일즈에 소질이 있는지 실적이 좋았다. 처음 마산에서 도서 세일즈를 시작했는데 5~6개월이 지나자 출판사가 울산으로 이사를 간다 해서 그도 따라 갔다. 물론 집 나온 변00(57년생) 씨도 함께였다.

김규인 씨 결혼식. ⓒ이복남

알고 보니 보통 도서외판을 하는 출판사는 한 곳에서 5~6개월을 넘기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것이 관례였다. 그는 출판사를 따라 서울도 가고 제주도도 갔다. 출판사가 전국을 떠돌다보니 출판사 사무실도 여관이었고 그도 여관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아내의 배가 불러 왔다.

혼인신고는 했지만 결혼식을 하고 애를 낳아야 되겠다 싶어서 아내의 집 즉 처가를 찾아갔다. 재산도 한 푼 없이 딴따라를 하던 놈이 어찌 우리 딸을 넘보느냐고 장인장모는 노발대발 했다. 그는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고 결혼승낙을 받기 위해 몇 번이나 더 처가를 찾아야 했다.

“장인장모 앞에서 절대로 마누라를 고생안시키겠다고 맹세 했습니다.”

장인장모도 마지못해 승낙은 했으나 이미 시간은 흘러서 결혼식도 못 한 채 아내는 첫 딸을 낳았다. 1981년도에 부산에서 결혼식을 하고 떠돌이 세일즈맨 생활을 청산했다. 부산에 정착하면서 ‘현대유통’이라는 의료기 임대업을 시작했는데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족사진. ⓒ이복남

아내는 둘째 아들을 낳았고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딸은 공부도 잘했고 커서 탤런트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는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대신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러라고 했다. 딸이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용호동에 32평 아파트도 하나 샀고, 시간이 날 때면 딸과 딸의 친구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치킨이나 피자를 사주기도 해서 ‘00아빠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처음 아파트를 사고는 장인 장모를 초대해서 거나하게 대접하기도 해서 장인장모가 놀라기도 했었다.

이를테면 잘나가던 황금기였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해야 하나, 그의 황금기는 2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부산에 정착하면서 해병전우회에서 활동했는데 1997년 9월 25일 포항에서 해병전우회 모임이 있었다. 그는 해병전우회 마크가 그려진 봉고차를 몰고 갔는데 포항에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경주로 가는 길에 양동교 교각을 들이 받으면서 정신을 잃었다.

“밤 1시경에 사고가 난 모양인데 인적도 없는 비 내리던 밤의 깜깜한 다리 밑이라 3시경에야 발견이 되었답니다.”

경찰에서는 빗길에다 피로가 누적된 졸음운전으로 일어나 사고라고 했다. 발견당시 왼쪽 다리는 짓이겨지고 오른쪽 다리는 무릎 위에서 절단되었는데 그를 발견한 119에서는 잘린 다리를 병원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접합술은 세계 최고라고 들었지만 이 무슨 가혹한 운명인지 그는 너무 늦게 발견되는 바람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의사는 잘려나간 다리는 보지도 않은 채 오른쪽 다리의 잘린 부분을 봉합해 버렸다. 의사가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의식불명상태였다. <4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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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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