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웨스턴미시건대학 시각장애인재활학과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서울맹학교에서 삼윤장학금도 한 학기에 200만원씩 받았다. (삼윤장학회는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숨진 맹학교 교사 정윤민씨 세 자매의 아버지인 정광진 변호사가 1996년 세웠다. 필자 주)

아내와 아리조나에서 ⓒ이복남

유학 2년째에는 한인교회에서 약간의 후원금을 받았고 학교에서 연구조교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2001년 가을 미시건 주립대 재활상담과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을 때, 친구 결혼식이 있어 한국에 왔다.

“니 혼자만 결혼 하냐, 내게도 여자 좀 소개시켜 주지” 친구가 한 아가씨를 소개했다. 이진화(현재 33세)씨는 성신여대 일어과를 나와 실로암복지관에서 일어 점역 등을 하고 있어 시각장애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만나보니 맘에 들었다.

“다음 주에 어머니 생신인데 우리 집에 좀 와 줄 수 있겠어요?”

진화씨는 어머니 생신에 와 주었다. 그리고 곧 미국으로 가야 되는 데 CD 등 살 것이 있는데 좀 도와 줄 수 있느냐니까 싫다고 했다. 섭섭했다.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시각장애인이 물건 사는 것 좀 도와 달라는데 그것도 거절하느냐.

진화씨는 마지못해 따라 나서는 것 같았다. 용산 상가에 같이 가서 필요한 CD를 사고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필요한 일 있으면 부탁을 하고 싶으니 e메일을 알려 달라고 했다. 미국에 돌아가서 진화씨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겨울 방학이 되었지만 한국에 갈 여비가 없어 맘을 졸이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장학금 1000불이 들어왔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다이아몬드 목걸이 세일이 있어 큰 맘 먹고 100불에 목걸이 하나를 사서 진화씨를 만나러 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서 진화씨를 만났다.

첫아들 영인이와 함께 ⓒ이복남

다이야 목걸이를 건네며 프러포즈를 했다.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교수가 될 거다. 평생 사랑하고 잘 해 줄 테니까 결혼해 달라고 했다. 진화씨의 마음이 반쯤은 돌아선 것 같았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다. 진화씨는 집안 식구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시니 아무래도 안 되겠단다.

돈벌이도 없는 가난한 유학생인데다가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라니 어느 부모가 딸을 주고 싶겠는가. 이해는 하면서도 야속했다. 마음 착한 진화씨는 투병 중인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차마 거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숱한 고난을 이겨왔는데 결혼까지 장애에 부딪히다니 절망스러웠다.

그러나 그에게 절망이란 단어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다시 진화씨를 만나 장밋빛 꿈을 펼치며 설득을 했다. 만났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면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진화씨의 확답을 받지 못 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3월 봄방학에 다시 돌아왔다. 진화씨 아버지는 그의 끈질긴 설득에 “그렇다면 너희끼리 해라, 방해는 안 하겠다”며 반승낙을 하셨다.

박사학위 받던 날 ⓒ이복남

2002년 5월 18일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진화씨 아버지,즉 장인은 마지못해 승낙을 했지만 딸이 미국으로 떠날 때는 잘 살라고 축복해 주었다.

그런데 5개월 만에 장인인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 아내를 장인 병간호를 위해 한국으로 보냈는데 얼마 후 장인은 유명을 달리하셨다. 아내는 다시 돌아왔다. 결혼하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혼을 하고나자 아내는 그가 내 사람이다 싶었는지 지극정성을 다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책이나 자료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어렵사리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내가 다 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아내는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하려해도 학생동반비자였기에 취업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아내는 아침부터 세탁소에서 빨래더미를 나르고 분류하고 세탁을 했다.

그 무렵 아는 교수의 부인이 손을 다쳤는데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는다며 걱정을 했다. “제가 한번 봐 드리지요.” 그는 부인에게 침을 놓아 손을 고쳐 주었다. 맹학교에서 이료(理療)과목으로 인체해부학을 비롯하여 침술과 안마를 배웠던 것이다. 교수 부인이 손이 낫자 명의라고 소문이 나서 제법 푼돈은 벌수가 있었다. 조성재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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