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김남주 시인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민중가요로 불리고 있지만 이 노랫말은 장애인 재활에 있어서도 너무나 애절하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들판을 지나 가파른 고갯길을 혼자서 뼈를 깎고 눈물을 삼키며 기어오르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그 때 그의 손을 잡아 둔 동지 한사람이 있었으니 둘이라면 못 오를 산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둘이 아니라 셋이 되고 넷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함께 가고 있으니 그 길은 장애인 재활 전문가의 길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조성재씨. ⓒ이복남

조성재(37)씨는 경기도 과천에서 아버지 조수행(72)씨와 어머니 김혜자(작고)씨의 3남 1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빛의 세상은 모르는 태어날 때부터 눈을 감은 아이였다.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병원과 침술원과 점집 등 전국 방방곳곳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길고 긴 순례 길에 나섰으나 아이는 눈을 뜨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언제 처음 알았을까. “아마도 맹학교에 입학 하면서였을 겁니다. 세상에 빛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른 것은 저 마다의 색깔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까요.”

집은 과천인데, 학교(서울맹학교)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어머니와 같이 등하교를 했고 중학교 2학년부터는 기숙사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기에 경제적으로도 별 부족함은 없었고 학교생활도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취침시간에 몰래 라면 끓여 먹은 것 외에 일탈행위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조성재씨가 행복한 신혼시절 아내와 찍은 사진. ⓒ이복남

고등학생 때 역사에 흥미를 느끼면서 좋은 학교를 나와 훌륭한 역사학자가 되는 꿈을 가졌다. 역사공부는 정말 열심히 했지만 국사나 동양사는 한문 때문에 할 수가 없어서 그 대신 서양사에 매달렸다. 그 때 배운 서양사는 아직도 기억한다고 해서 필자가 영국 역사에 대해서 몇 가지를 물었다. 헨리8세는 1509년부터 1547년까지 집권했고, 천일의 앤에 나오는 앤 불린은 1536년에 사형을 당했고,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1세는 1558년부터 1603년까지 집권하였으며... 그의 암기실력은 녹음테이프를 돌리는 것처럼 줄줄줄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런데 서양사는 서울대와 고대 밖에 없었는데 성적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서양사를 못할 바에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단국대 정외과를 지원했다. 그러나 정외과 공부가 별로 흥미가 없어 재수를 하려고 자퇴를 생각하자 어렵게 들어갔는데 왜 그만 두느냐며 집안에서 반대를 했다.

대학 때는 과천에서 단국대가 있는 한남동까지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면서 혼자 다녔다. 요즘은 학습 지원센터도 있고 봉사자도 있지만 그 때만해도 책이 별로 없었고 특히나 동양정치사상사 등은 한문 때문에 공부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점자도서관이나 장애인복지관을 찾아다니며 점자나 녹음 도서를 부탁해서 공부를 했다.

조성재씨가 식탁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모습. 먹는 것은 즐거워. ⓒ이복남

이왕 정외과 공부를 시작했으니 미국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졸업 무렵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시각장애인복지관에 취직을 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고 한맹뉴스라는 점자도식지도 만들면서 기획과 홍보 일을 주로 했다.

베트남에서 '세계맹인연맹(WBU) 아시아태평양 안마 세미나'가 열렸는데 시각장애인 18명의 통역겸 인솔자로 참여를 했다. 대학 때 필라델피아에서 시각장애인 국제통합프로그램에 1년 동안 연수를 한 덕분으로 영어 통역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대외적인 행사를 기획하고 홍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복지관에서 미국의 재활전문대학으로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참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회장이 바뀌면서 물 건너 간 것 같았다. 그런데 복지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정외과 보다는 재활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재활 특히 직업재활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조성재씨 이야기는 2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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