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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bnews.kr/1Ph5

만화가 꿈꾸던 소녀서 만화계 리더된 이해경

소아마비로 학업 포기 했지만 진짜 교과서 되어준 ‘만화책’

74년 ‘현아의 외출’로 데뷔…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에 선출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0-01-26 21:30:12
만화가 이해경. ⓒ이해경 에이블포토로 보기 만화가 이해경. ⓒ이해경
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일본 쿄토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시집온 이방인이었다. 이해경은 경남 의령에서 3남 2녀의 맏딸로 태어났다.

이해경은 국내에 소아마비 백신이 대량 보급되기 전인 1950년 초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몸을 가누지 못해 거의 누워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부축을 번갈아 받으며 학교에 간 날은 고작 사흘. 곁에서 누군가 계속해서 돌봐주지 않으면 학교생활을 온전히 이어 갈 수 없었기에 그녀는 학교를 포기했다.

당시 아버지는 다리에 종양이 생겨 한쪽 다리를 절단한 상태여서 어머니는 아버지 병수발을 들어야 하기에 딸에게 매달릴 여력이 없었다.

한 달 동안 개인교습을 통해 글을 깨우치고 초등학교 저학년 과정을 마친 이해경은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정독하며 한자와 영어를 익혀 나갔다. 그녀는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 배워야 할 것을 공부해서 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방문을 열고 지나가는 언니 오빠들을 불러 세워 묻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오빠야, 이리 온나.”
“와?”
“와 보면 안다.”

이렇듯 심청이 젖 얻어먹듯 공부를 이어가던 이해경에게 찾아온 진짜 교과서는 바로 만화책이었다. 만화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만화는 제가 하고 싶은 걸 모두 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 같았어요. 그래서 3년 동안 줄곧 만화만 봤죠. 계속 보다 보니 직접 그리고 싶어지더라고요.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건 열세 살때부터예요.”

어머니는 일본에서 여학교를 다니며 미키마우스 등 한국보다 앞서 만화를 보고 성장한데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인지 이해경뿐만 아니라 바로 아래 여동생과 세 명의 남동생들 모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들 중 막내 남동생은 현재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자식의 소질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부산지역 유명 만화가들을 찾아다녔어요. 그렇게 만난 분이 60년대 액션만화의 대가인 오명천 선생님과 토니 장 선생님이에요. 좋은 만화를 그리려면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며 영화나 책도 많이 찾아보고, 여기저기 많이 다니라고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도서관과 영화관이 또 다른 학교가 됐지요.”

위-명지대 야외수업중, 아래-오늘의우리만화상 시상식에서. ⓒ이해경 에이블포토로 보기 위-명지대 야외수업중, 아래-오늘의우리만화상 시상식에서. ⓒ이해경
만화가가 되기까지

만화가가 되기로 작정한 뒤부터 이해경은 10년 간의 습작 기간을 거쳐 서울로 원고를 보냈다. 어린이 명랑만화의 선구자인 김정파 만화가가 그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고 서울로 오라고 했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여동생이 없으면 아무데도 다닐 수가 없어서, 김정파 선생님께 제 상황을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여동생과 함께 상경해 선생님 문하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서울살이가 시작됐죠.”

서울로 올라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국일보 만화공모전에 응모하여 최종 후보까지 올랐지만, 사람들 앞에서 만화를 그려 본 일이 없었던 탓에 실기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해경은 방바닥에서 엎드린 자세로 그림을 그려 버릇하여 책상에서 그림 그리기가 잘 안 되었다. 그때 한국일보에서도 바닥에 내려앉아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모습으로 이해경의 미래를 예단해 버렸던 것이다. 그때 함께 시험을 봤던 사람은 아주 유명한 만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1974년 만화 잡지 『새소년』 공모전에 도전하여 만화 <현아의 외출>로 가뿐하게 데뷔의 꿈을 이루었다.

이해경의 본명은 이미라인데 후배 작가가 이미라라는 이름으로 이미 만화를 출판하여 이미라 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미혜라는 이름으로 만화를 출판을 했는데 출판사가 망했다. 그 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이해경으로 개명을 하였다.

만화가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도 잠시, 이해경은 사회의 부조리에 실망감을 느끼고 1977년 돌연 진주로 내려왔다. 하지만 손에서 붓을 내려놓는 일은 없었다. 지역 신문의 삽화 작업을 하며 좋은 만화를 그리려면 색채 감각을 익혀야 하기에 문인화를 배웠다. 그때 외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척추수술을 받게 되었다.

“엎드려서 30년을 살았기 때문에 온몸에 변형이 생겼어요. 다리는 ㄱ자로 굽어지고, 척추가 S로 휘어서 심장을 눌러 숨쉬기도 힘들었죠. 여수애양재활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목발을 짚고 설 수 있게 됐어요. 혼자 서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 수술을 택했죠. 동네 서점은 대형서점처럼 크지 않아서 휠체어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술 취한 행인이나 뛰어노는 아이들과 부딪쳐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어 길바닥에 쓰러진 채로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려야 했다. 걸어서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교회를 가는 데도 50분이나 걸렸다. 그렇게 1년을 다니니 20분으로 시간이 줄기는 했지만, 한 해 동안 여섯 번 크게 넘어지고, 이동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등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 그녀는 다시 휠체어에 앉았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려요. 원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도 남에게 자료 조사를 맡기면 제 마음에 들지 않고, 순발력이 떨어져 다른 작가들과 경쟁하기에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서 출간된 단행본 수도 30여 권 정도로 많지 않지요. 하지만 만화가로 살아온 삶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만화가는 영화감독과 같다고 생각해요. 시나리오부터 연출, 그림, 채색까지 혼자 다 해야 하니 감독보다 더 대단할 수도 있어요.”

제9회 국제 만화가 컨퍼런스에서. ⓒ이해경 에이블포토로 보기 제9회 국제 만화가 컨퍼런스에서. ⓒ이해경
희망을 전하는 만화가

40대 중반에는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만화창작학과 강사로 3년 동안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무학력 대학강사가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만화 실력과 열정 때문이었다.

그때 휠체어 만화가가 대학 강단에 섰다고 언론에 많이 공개되었다. 이해경은 학생들을 만나 만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너무 즐거웠지만 학벌 중심 사회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서 51세에 국립재활원에 단기 입소 운전면허 취득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그곳에서 많은 장애인들을 만났다. 혼자 휠체어를 미는 힘을 키우겠다고 재활원 경사로를 오르내리며 연습을 하다가 왼쪽 어깨 인대가 파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경치 좋은 곳에 커피 전문집을 오픈했었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커피 수요가 많지 않아서 손님이 마신 커피보다 자신이 마신 커피가 더 많을 정도로 장사가 되지 않았다. 돈을 버는 재주는 없어서 문을 닫았다.

당시 장애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어 시위 현장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하며 투사가 되어 보기도 했지만 만화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해경은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작품 활동을 삶의 낙으로 살았지만, 대중적인 만화가는 아니라고 스스로 말한다.

“예전부터 꾸준히 여성 성인만화를 그려왔어요. 대부분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인데, 아이들보다는 여성들을 독자층으로 작업했죠. 하지만 어른들이 만화를 보기 시작한 게 웹툰이 등장한 최근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만화도 남성들이 주독자층이니 저의 만화가 대중적이기는 쉽지 않죠. 한국에는 없는 장르의 만화여서 출판사에서 출간을 결정하지 못하더군요. 생각다 못해 일본 출판사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1996년에 일본에서 국제만화세미나가 있었거든요. 그때 도쿄에 있는 만화 출판사에 가서제 작품을 보여줬어요. 외국 작가의 작품을 연재한 적이 없는 출판사여서 처음에는 편집장도 당황스러워했지만 작품을 보고는 흔쾌히 연재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2년간 일본 만화잡지에 연재했어요. 소수여도 독자층이 굳건한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제 삶에서 희망을 얻어 만화가의 꿈을 키우는 후배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떠들썩한 작품을 남기기보다는 희망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멘토 만화가가 되는 게 제 목표예요.”

그래서 이해경은 남양주시장애인복지관에서 만화가의 꿈을 키우는 장애청소년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장애인만화가 박기소, 지현곤, 라일라 작가와 함께 전시회 <겨드랑이가 가렵다>전을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전시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만화가 이해경. ⓒ이해경 에이블포토로 보기 만화가 이해경. ⓒ이해경
여성 최초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임원 공고가 뜬 것을 보고 딸처럼 그녀를 살펴주는 만화가가 ‘선생님도 응모해 보세요.’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럴까?’라고 답했다. 자격이 있나 없나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만화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고 있는 자신에게 언제나 당당하다. 처음 도전인데 이사에 선임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7월 첫 이사회가 열렸다. 백내장 수술을 한 상태였지만 첫 이사회인 만큼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사회 안건은 이사장 선출이었다. 이해경은 처음이라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임시 의장이 이사장을 추천하라고 하자 침묵이 흘렀다.

그때 한 분이 “제가 쭈욱 지켜봤는데 이해경 선생님처럼 올곧고 열정 있는 만화가는 아직 못 뵈었습니다. 이해경 선생님을 추천합니다.”
“또 추천해 주십시오.”
“저도 이해경 선생님이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 추천해 주세요.”

계속 다른 분을 추천하라고 종용했다.
“제가 30년 동안 선생님을 보아왔는데, 이해경 선생님이 적격입니다.”
단일 후보로 이사장 선출 투표에 들어갔는데 이사장이 되려면 과반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해경이 투표 결과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투표 결과가 나왔다.
만장일치였다. 이렇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제9대 이사장으로 이해경 작가가 선출되었는데 그것이 최초 여성인데다 장애인 최초여서 관심을 집중시켰다.

지난 8월 취임식에서 이해경 이사장은 ‘만화계 선배, 후배, 동료들이 일궈 놓은 한국 만화계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더 값진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 18명과 감사 2명 등 모두 20명으로 구성된 만화영상진흥원 제9기 이사회가 출범했는데, 새 이사진에는 원수연 웹툰협회 회장과 형민우 작가, 김병수 목원대 만화 애니메이션학과 교수, 고경일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한상정 인천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단장, 유수훈 평화문화창작소 잇다 대표, 박준영 경기문 화재단 이사, 서채환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 집행위원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해경은 요즘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 아버지는 평생 병에 시달리시다 54세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평생 장애인 딸을 보살피다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지 9개월 만인 2013년 가을 세상을 뜨셨다. 그때가 84세였다.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은 작가가 아니어서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한국카툰협회 조관제 회장이 ‘어머니도 작가시죠. 저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드셨는데’라고 이해경을 칭찬하며 어머니를 격려해 주었다.

방송인 강원래 씨와 친분이 있어서 이사장 선임을 알렸을 때 강원래 씨가 이렇게 물었다.

“그게 뭔데요?”
“내가 만화대장이 된 거야.”

이 말에서 이해경 이사장이 얼마나 소박하고 명쾌한 성격인지 알 수 있다. 그녀는 한국만화 영상진흥원 이사장이 만화계의 감투가 아니라 빚을 갚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만화에게 받은 사랑 만화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이해경이 그린 이해경. ⓒ이해경 에이블포토로 보기 이해경이 그린 이해경. ⓒ이해경
만화가 이해경

# 개인전 1974년 『새소년』 잡지만화 '현아의 외출' 데뷔 1978년 진주개천예술제 동양화 부문 입상 1979년 경남도립미술대회 동양화 부문 입상 1980년 경남예술제 동양화 부문 입상 1982~84년 부산MBC 어린이 문예 연재, 경남일보 어린이판 만화 삽화 연재 1984~85년 새소년 만화공모전 입상, 만화왕궁 연재 1996~98년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만화창작학과 강사 2005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1989년~현재 주간만화, 주간만화후레쉬, 매추만화, 만화독서광장, 르네상스, 소년 동아일보 (다다의 요리일기), 어린이동산, 르네상스, 온라인 웹, 콩나무, 계간 만화, 코믹타운, 일본 만화잡지 YOU, 한국장애인 고용안정협회, 부천시복지관 문해학교 등 만화 연재 다수2015~2016년 웹툰 <겨드랑이가 가렵다> 연재2017년 만화리빙 뮤지엄 프로젝트 선정, 흔적을 찾아서 <펄벅여사 연대기> 제작(한국만화박물관)작품집「 리빙스턴」 ,「 허드슨 테일러」 ,「 드와이트 무디」 ,「 선다 싱」 ,「 우유 빛 천사」 ,「 천사의 시」 ,「 쿠스코」 , 「천로역정」 ,「 겨드랑이가 가렵다」 ,「 커피로맨스」 등

# 현재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출판만화가협회 부회장 서울동화픽쳐스 만화(웹툰) 사업부 자문위원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지원사업 청년장애인웹툰아카데미 자문위원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고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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