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계에서 활동하는 장애여성도 많지 않지만 리더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20년 동안 장애여성인권 운동가로 꾸준히 활동한 사람이 있다.

바로 장애여성네트워크의 김효진 대표이다. 오래전부터 백발이라서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아직 50대 중반이다.

인권강의에서는 부드러우면서 재미있는 이야기 아줌마처럼 보이지만 회의나 발표를 할 때는 소신 발언으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김효진은 2017년 대한민국인권상 국민포장을 받아 장애인권운동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녀는 과연 장애여성인권운동가로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김효진은 누구인가?

그녀는 1962년 4녀 1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찾아온 소아마비로 유년기는 엄마나 언니 등에 업혀 세상 구경을 하였다.

초등학교 입학이란 집 밖 생활을 위해 그녀의 연약한 손에 쥐어진 것은 나무로 만든 작은 목발이었다.

어린아이였지만 그녀는 목발에 의지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아이들의 이상한 눈빛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당당한 만족감이었다.

장애여성네트워크 김효진 대표 ⓒ김효진

초등학교 3학년 때 여수 애양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보조기를 착용한 후에는 목발없이 한 시간 정도는 서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자립심을 키워 주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할 시기 엄마는 취업이 가능한 학과를 원했다. 그녀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부모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알고 있었던 담임 선생님은 국문과를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문학도가 되었다.

대학 입학 후 그녀는 넓은 캠퍼스에서 강의실을 옮겨다니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였다. 수업에 늦게 들어온다고 야단치는 교수도 있었다.

운동권 학생, 안정적인 직장인

당시 대학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서클 활동을 하며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동안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가해졌던 편견과 차별을 혼자서 참아내며 가슴에 생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유인물 내용을 쓰고 제작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어느덧 운동권 학생으로 유명해졌다. 학과 교수들이 그녀를 불러 ‘세상에 대한 불만을 그런 식으로 해소하면 안 된다.’며 충고해 주었다.

기성세대 눈에는 그녀의 학생운동이 장애인으로서의 한풀이로 보였던 것이다. 그녀가 뜻을 굽히지 않자 특수교육학과 교수가 그녀를 찾아와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며 학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졸업 후 한동안의 실직 상태에 있다가 출판사에 취직을 하였지만 직장다운 직장은 국토개발 연구원 출판팀에서 근무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은 되었지만 창의적이지 않는 업무가 재미 없었다.

그때 유일한 낙은 주말을 이용한 한국 DPI 활동이었다. 전 세계 장애인들이 당사자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직한 단체가 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인데 전문가 집단에 의해 장애 인을 서비스 대상자로 재활에 초점을 맞춘 패러다임을 장애인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며 인권의 문제로 접근하는 장애인운동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주중에는 출근하고 주말에는 운동 현장에서 밤을 새워 토론하며 장애인운동의 방향을 만들어 가는 생활을 하다 보니 몸이 견디지를 못하고 병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3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제도권 밖에서 살게 되었다.

뜻밖의 결혼과 뜻밖의 육아

퇴직금으로 자동차를 구입하기로 하였다. 회사에 근무를 할 때는 출퇴근만 하면 되지만 장애운동 활동가는 끊임없이 현장을 따라 움직여야 해서 자동차가 필요하였다. 장애인용 차량은 여러 가지 혜택이 있어서 운행하는데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장애여성 자동차 세일즈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에게 자동차 구입을 위한 상담을 하다가 친해졌다.

안인선 씨인데 휠체어를 사용하는데 결혼을 하여 남편과 자녀가 있는 멋진 여성이었다. 그녀가 장난처럼 소개해 준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가 중매쟁이가 된 것이다. 김효진은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고 그저 막연히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처음 본 그 남자가 싫지 않았다. 남편은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컴퓨터교실 졸업생으로 프로그래머 일을 하는 차분한 성격이었다. 나이도 동갑이고 장애 정도도 비슷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로 소통이 잘 되었다.

장애인 부부로 살아가며 생길 문제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들은 그런 문제는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결심하였다. 그때 김효진 나이 41세였는데 바로 임신이 되어 아들 민찬이 태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육아에 대한 걱정을 하였지만 그녀는 걱정 대신 아기를 키울 방법을 찾았다.

친정과 시댁 어머니 모두 연로하여 아기를 키워줄 수 없었다. 마침 서울시에서 장애여성육아지원서비스 제도가 마련되어 북부장애인종합복지관을 통해 육아도우미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당시 서울시 장애인복지 담당자가 정재우 씨였는데 본인이 장애여성으로 육아지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기획한 사업이었다. 이렇게 사회적 서비스를 통해 성장한 민찬이가 14세가 되었다.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엄마는 아들을 키우는 방식도 사람 중심이다. 엄마 아빠가 장애인이라서 주위 사람들은 어린아이에게 ‘엄마, 아빠 많이 도와주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 아빠가 장애인이어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부도 원하는 방식대로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였다.

사교육을 시켜야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대기업에 취업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아들의 불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장애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바쁜 엄마의 사회 활동 때문에 생긴다. “엄마, 내가 엄마를 100번이나 불렀어요.”라고 투정을 부린다.

Q: 장애인권운동가, 작가로 쉼 없이 활동하고 있는데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글을 쓰는 것도 장애인권운동의 한 방식이다. 그동안 발간한 책들이 거의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의 시선에서 좀 더 내밀하게 표현한 것이다. 에세이뿐만이 아니라 아동문학으로 장애인 문제를 좀 더 쉽고, 감동적으로 알리고 싶어서 얼마 전부터 장편동화를 쓰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다.

대학원에서 아동문학 평론을 전공해서 동화쓰기가 편해진 듯하다. 그동안 5권의 책을 발표하였는데 가장 최근 작품이 『특별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이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특별하게 보거나 부족 하게 보기 때문에 편견이 생긴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시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도 난 외출한다』는 책을 가장 아낀다. 당연한 외출을 이렇게 특별히 말하고 있는 것이 비장애인들에게 의아하게 들렸을 시절에 이 책이 장애인의 이동권과 접근권을 주장하는 작은 모티브가 되었다.

김효진 대표 가족사진과 그의 작품집. ⓒ김효진

Q: 장애인권의 현주소는.

비장애인들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 살기 많이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또한 장애인복지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개인의 삶에 대한 변화가 없어서 장애인권의 현주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장애인권이 발달하려면 장애인 인식이 좋아져야 한다. 사람들은 장애를 약점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장애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장애인은 약자가 되고 비장애인은 장애가 없다는 이유로 기득권를 가진 갑이 되어 교양이 있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게 갑질을 하고, 교양을 내팽개친 사람은 대놓고 갑질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애인 인식은 참 모순적 양태를 보인다. 장애인주차 구역에 주차를 하고 아빠, 엄마, 아이 둘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여긴 장애인 주차 구역이예요.”라고 말하자 젊은 남편이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앞에서 “와이프가 정신장애예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예쁜 부인을 졸지에 정신장애인으로 만든 남편을 그 여자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아이들은 엄마가 정신장애라고 단정지은 아빠의 말을 어떻게 기억할지 아득해져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면 장애인을 자처하는 이 태도가 우리나라 장애인 인식과 인권의 현주소 라고 말하고 싶다.

국제회의 참가사진(인도). ⓒ김효진

Q: 주요 활동은.

인권 강사로 학교나 시설에 가서 강의를 한다. 누군가는 장애인 인권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목발을 짚고 계속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앉아서 강의를 하는데 한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직원에게 방석을 2개 갖고 오라고 해서 의자의 높이를 올려 주었을 때 너무 고마웠다.

그분은 인간에 대한 배려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묻지 않아도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발견하여 신속하게 편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인권 옹호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장애인을 돕는 것이 양보가 아니라 배려라고 말해 준다.

양보는 빼앗긴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배려는 자발적 인간애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활동은 방송이다.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KBS-3라디오에서 방송을 했는데 요즘은 ‘장애뉴스 다시보기’를 하고 있다.

신문 기사를 장애인 인권 차원에서 리뷰하는 것인데 언론을 모니터한다는 의미도 있어서 보람이 크다. 벌써 5년째 하고 있다.

내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국제 활동이다. 1년에 두세 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하곤 한다. 이렇게 국제 활동에 투자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장애여성 이슈가 주목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장애여성 이슈를 놓고 열띤 토론이 이루어진다. 그만큼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장애여성 운동가들이 국제 무대에서 이끌어 낸 여성장애인 이슈를 국내로 끌어들이고 있다.

UN장애인권리협약이나 아태장애인 10년의 장애여성 이슈는 한국 장애여성 참가자들이 주도하며 장애여성 섹션을 만들어 낸 것은 정말 보람이 크다.

Q: 장애인권운동가로서 지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투운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장애여성들은 미투운동의 영향권 밖에 있다. 성폭력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장애여성들은 미투운동에 동참하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장애여성이야말로 고질적이고, 방대한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이다.

영화 <도가니>처럼 장애인 시설에서도 성폭행이 자행되고 있고, 집에 있는 장애여성은 이웃이나 근친 관계 등 아는 사람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 (38.8%) . 장애여성은 활동보조인이나 장애인 콜택시 기사 심지어 장애인 단체에서도 성추행을 당해 안전한 곳이 거의 없다.

장애인 성폭행은 너무나 심각한데 큰 사건이 터졌을 때 반짝 관심을 보였다가 흐지부지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장애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성폭력을 시스템으로 점검하고 보호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장애여성 스스로 목소리를 내면서 비장애여성들과 힘을 합치는 방식을 고민해 봐야 할 때이다.

Q: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장애여성네트워크를 법인화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 예산을 받으면 운동의 방향이 변질될 수 있어서 가난한 NGO로 활동가들과 의기투합하여 사회문제에 빠르게 대응하며 당당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장애여성의 인권을 위해 성인권교육진흥원을 정부 기관으로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장애여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처럼 칼럼도 쓰고 동화도 집필하면서 장애인권을 글로 표현하는 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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