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턴 ⓒ세계장애인물사

존 밀턴(John Milton)은 1608년 영국의 한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문학과 음악의 소양이 높은 교양인으로서 아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야망이 대단했다.

밀턴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평생 동안 책을 손에서 놓은 일이 없었다. 그는 후일에 자기는 그러한 독서 생활로 말미암아 실명이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지식욕은 거의 탐욕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구 생활에서 떠나 본 일이 없고 자정 전에 잠들어 본 일이 없다. 주로 이 때문에 시력을 상실한 것이다.”

밀턴은 1620년에 세인트 폴즈 학교에 입학하였고, 162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 스트 칼리지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의 그의 별명이 ‘크라이스트 귀부인’이었던 것을 보면 그가 용모단정하고 얌전한 학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학 수업기

그러나 그는 단지 열심히 공부만 하는 착한 학생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구태의연한 중세기 적인 대학 제도에 반항하다가 한 학기 동안 정학 처분을 당한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한평생 성직자로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으나, 당시의 타락한 교회를 보고 불만을 품게 되어 차라리 문학으로 명성을 떨쳐야겠다고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호튼에 있는 아버지의 별장에 머물면서 광범위한 독서를 했고, 가면극 <코머스(Comus)>, <리시다스(Lycidas)> 등의 작품을 썼다. 그 작품들은 그의 초기 문학의 걸 작들로써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주요 작품들이다.

1638년에 밀턴은 파리, 제네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고, 여행 도중 갈릴레이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다음 목적지인 그리스로 떠나기 전에 고국으로부터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고조되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기 때문에 여행을 취소하고 즉시 귀국해야 했다.

이리하여 밀턴 생애의 제1기는 끝난다. 이 시기는 일종의 준비 기간으로서 학교교육을 마친후 시작(詩作) 활동의 본 궤도에 오른 시기였다.

그의 시는 주로 영어로 씌어졌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쓴 시도 상당수 있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사실이다.

밀턴의 초기 시의 걸작인 <쾌활한 사람(L'Allegro)>과 <침사(沈思하는 사람 Il Penseroso)>을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한다면, 그 이전의 <그리스도 강탄 (降誕) 의 아침에 (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와 함께 그의 시 스타일은 이미 제1기에 완성된 것이고, 후기 시는 초기 시의 스타일을 다소 변형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가 쓴 시들의 주제도 <코머스>와 같은 타락에의 유혹 문제에서 후기의 <실락원>, <복락원>, <투사삼손>과 같은 인간 구원의 주제로 발전한 것이다.

현실 정치 수단으로서의 문학

그가 대륙 여행에서 귀국한 1639년은 그의 생애의 제2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그는 정계에 투신코자 하였으나 문필로서 자유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에 더욱 사명감을 느껴 잠시 각종 논설 문을 발표하는 논객(論客) 생활을 하였다.

이때의 그는 시를 별로 쓰지 않고, 종교·언론·정치 문제와 관련된 많은 산문을 썼다. 그는 심지어 이혼의 자유에 대한 소논문까지 써서 결혼 생활에서 쌍방이 불화할 경우엔 이혼의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당시 영국의 봉건적인 사회제도하에서는 매우 대담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의 이혼론에는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이 암시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그의 부인은 왕당파(王黨派) 가정 출신으로서 그로 인한 정치적 의견의 차이가 큰 데다 연령의 차이 또한 많아서 부부간의 불화가 심화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1642년에는 영국에 내란(Civil War)이 일어나, 영국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세력의 반목은 결국 무력충돌에까지 이른다. 루퍼트 지휘 하의 왕당파(Cavaliers)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Roundheads)로 나뉘어 싸운 결과 왕당파가 패하여 찰스 1세는 체포되었고 결국 처형당했다.

그 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부가 수립되어 1649년에서 1660년까지 왕정이 중단된다. 밀턴은 이때 크롬웰의 청교도 정부에 입각하여 약 10년간 라틴어 장관으로 충성을 다했다. 이 라틴어 장관이란 정부의 문서를 담당하는 문공부나 총무처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직책으로 생각된다.

이 직책을 맡았던 밀턴은 각종 팸플릿을 내서 청교도 정부의 정치적, 종교적 입장을 문서로 작성하고 홍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때 그는 너무 과로한 데다 늘 지속해 오던 지나친 독서 생활이 원인이 되어 끝내 1652년경에는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다.

작품에 몰두

밀턴은 31세에서 51세까지 21년간을 정치를 위하여 아까운 시재(詩才)를 낭비한 셈이 된다. 그러나 그가 체험한 실생활은 그가 후기의 대작을 쓰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고,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식견과 안목을 견실하게 발전시켜 주었을 것이다. 즉 호튼의 별장에서의 많은 양의 독서와 그 후의 20년간의 생활을 통한 경험은 대작 집필을 위한 준비 작업의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1660년의 왕정복고로써 밀턴의 정치 생활은 끝나고 작품을 쓰기 위한 은퇴 생활이 시작된다. 청교도 공화정부가 무너지고 왕정이 복구되었을 때 밀턴은 생명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을 공격하고 찰스 1세의 처형을 주장한 그의 논설문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땅히 처형을 당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왕 찰스 2세는 정적에 대해 최소한의 보복만을 가한 데다가 친구들의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처형은 면하게 되었다.

밀턴은 은퇴 후 시각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여러 해 동안 구상해 온 대작들을 집필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의 집필 방법은 직접 쓸 수가 없어서 그가 불러주면 딸이 그것을 받아쓰는 방식이었다.

그는 이미 젊었을 때 아더왕의 전설을 서사시로 써 보고자 마음먹은 일이 있었는데 말년에 와서야 비로소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한, 그리스 로마 시인들 못지않은 대서사시를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불후의 명작 탄생

<실락원>은 1650년대 후반부터 구상되었던 듯하다. 1665년에 집필을 완료하여 1667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인 1671년에는 <복락원(Paradise Regained)>과 <투사 삼손(Samson Agonisters)>이 출간되었다.

그가 1674년 66세로 세상을 뜨기까지의 그의 생애는 개인적으로는 실명과 정치적 퇴각으로 인해 가장 비참했던 역경의 시기였지만 시인으로서는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낳은 기간이었다.

그는 청교도적인 사상을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예부흥의 전통에 입각한 걸작들을 남겨 영문학사상 최대의 시인,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을 쓴 불멸의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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