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백종환 대표

장애인 관련 행사, 크고 작은 장애인복지회의 심지어 장애인 몇 명이 모이는 친목 모임 그 어디에 있건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존재감을 보이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백종환을 떠올릴 것이다. 백종환 하면 에이블뉴스가 연상된다.

이렇게 분명히, 확연히 이미지화된다는 것은 정체성이 확고한 것이고, 고유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성공을 의미한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두 좋은 날들이었다’는 드라마 대사처럼 백종환은 자신의 삶을 그렇게 모두 좋은 날들로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늘 보아 왔던 백종환을 이미지를 통해 만나면 더 잘 보일 것이다.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백종환 대표

Q: 언론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소회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로 딱 맞아떨어진 것이 장애인언론이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렸을 때는 문학 소년이었다. 여유만 있었다면 그쪽으로 도전을 했을 텐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대를 택했다.

졸업 후 ‘시민뉴스’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급여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양복 안주머니에 사직서를 써서 품고 다녔다. 지금은 가슴에 사직서가 없으니 이 정도면 만족한 것 아니겠는가.

Q: 어떻게 장애인언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첫 직장에서 쓴 첫 번째 기사가 장애인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 다닐 때 장애인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도와주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라 취재를 통해 장애인이 갖고 있는 문제를 직면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장애인 문제를 계속 파고들고 싶은 호기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약간의 정의감이 발동하여 장애인언론이 생겼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직서를 내고 장애인언론으로 왔다. 1990년 초에 장애인언론이 시작되었다. 장애인 당사자 중심의 장애인복지신문과 사주(社主) 가 비장애인이지만 장애인언론을 표방한 장애인신문, 세계장애인신문, 장애복지21이 있었다.

Q: 에이블뉴스를 창간할 당시, 에이블뉴스가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리라 기대를 했었는가.

에이블뉴스를 왜 창간했는지부터 말하고 싶다. 두 군데 장애인언론에서 근무를 했는데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이 정서적으로 공유가 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사주는 장애인언론의 목적이 단순히 발간 자체에 있었다. 사업적 접근이었다.

하지만 기자 입장에서는 장애인의 현실을 고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계자에게 해결책을 알아보는 저널리즘을 펼치고 싶었다. 그래서 저널리즘 구현을 위한 장애인 정서에 맞는 장애인언론이 필요했다.

그래서 2002년 12월 1일부터 에이블뉴스를 전송하게 되었다. 첫 인터넷 신문이어서 관심도 높았지만 기사 댓글을 통해 독자와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된 것이 장애인의 욕구를 표출하고 이슈화시 키는데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상근 직원 3명으로 어렵게 시작했을 당시 그렇게 단숨에 장애인계에 확산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그동안 장애인계에서 다루지 않았던 장애인의 성(性)을 주제로 한 칼럼은 하루 종일 포털사이트 대문을 장식했었다.

2008년도에는 네이버와 제휴를 해서 에이블뉴스 기사가 네이버로 검색이 되고 있다. 네이버 뉴스 스탠드에 장애인언론으로서는 유일하게 에이블뉴스가 위치해서 장애인 소식을 우리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조회 건수를 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에이블뉴스를 쉽게 창간해서 쉽게 성공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면 1999년부터 준비를 했다. 창간 비용을 만들기 위해 한국복지통신을 통해 장애인지방 신문을 만들어 주는 대행사업을 했다. 취재, 편집, 인쇄, 발송 모든 작업을 거의 혼자서 하며 수입구조를 만들었다.

에이블뉴스 초대 사장 이석형 대표가 신문 홈페이지를 제작해 주었고, 제호도 이석형 대표가 하고 있던 장애인용품을 판매하는 에이블몰에서 착안한 것이다.

백종환 대표가 현장에서 장애인들과 인사하는 장면. ⓒ백종환 대표

Q: 장애인언론이 장애인복지에 끼친 영향.

첫째는 장애인문제를 이슈화시켰다는 것이다. 일반 언론에서 다뤄 주지 않아 장애인이 모르고 있었던 일들이 에이블뉴스 기사로 올라가면 독자들이 댓글을 달아 호응해 주며 여론을 형성하였다.

둘째, 장애인 이슈의 연속성으로 장애인 정책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일반 언론에서는 한 번 기사를 내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에이블뉴스에서는 연속 보도를 통해 장애인계의 욕구를 알리고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도하였다.

셋째, 내용의 전문화이다. 화제성 기사는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면 에이블뉴스 기사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다. 에이블뉴스는 장애인 정보 격차 해소에 기여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에이블뉴스의 역할은 장애인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30년 넘게 장애인복지 현장을 지켜봤던 나로서는 매 순간 순간이 모두 소중한 역사인데 그냥 흘러가 버리고 있어서 안타깝다. 여력이 없어서 못하고 있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장애인복지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장애인계 어른들의 증언을 통해 장애인복지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

Q: 장애인복지 역사의 기록자란 생각이 드는데, 그 역사 속에서 현재의 장애인계는 어떤 모습인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장애인계가 참 숨가쁘게 달려왔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많은 분들이 했기 때문에 현재의 얘기만 하겠다. 2015년부터 장애인계는 침체기라고 본다. 그 이유는 새로운 이슈가 생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등급제를 비롯한 기존의 이슈들이 재생산되고 있다. 혹자는 그것이 장애인복지가 발전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올 이슈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진단하는 원인은 장애인단체 리더들이 장애대중의 시급성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애인단체들이 현재의 것들을 지키거나 유지하는데 더 힘을 쏟는 듯 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복지관이나 각종 장애인 관련 센터를 위탁받아 체제를 확대하는데 올인하고 있지 않은가. 장애인단체가 하나의 직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명분도 동력도 약해졌다. 이런 발언을 하면 공격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이것이 내 개인적인 분석이다.

Q: 최근 들어 에이블뉴스가 장애인계의 여론을 형성하는데 미진했다는 평도 있는데 동의하는가.

동의한다. 장애인계가 뜨거워야 에이블뉴스도 달구워진다. 그런데 요즘은 독자들의 적극성이 떨어져 여론의 세력화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이 뭘까 생각해 봤는데 장애인문제라고 해서 모두 자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으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기 주의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무엇보다 우리 책임이 더 크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해 인력이 부족하다. 기획 기사,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탐사 기사로 이슈를 만들어 내고, 온라인을 떠나 오프라인에서도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장애인복지 정책을 형성해 가고 싶지만 못하고 있다.

Q: 에이블뉴스를 비롯한 장애인언론 발전을 위한 고민도 하고 있을 텐데 어떤 방안이 있는가.

질문지를 받고 인터뷰를 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고민해 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하였다. 일반 적으로 언론은 광고 수입으로 운영이 되는데 장애인언론은 광고시장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장애인사업에 홍보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산 절약 일순위 항목이다.

그리고 장애인사업 홍보를 아직도 포스터나 팸플릿 제작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장애인복지의 전제 조건은 소위 장애인 인식 개선이라고 말하는 친장애인 정서 형성인데 그것은 제도가 아닌 대중의 이해와 협력을 얻기 위한 PR(public relation)을 해야 한다. 장애인복지 홍보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바란다.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의 가족사진. ⓒ백종환 대표

Q: 백 대표 이미지는 금수저인데 흙수저라는데 많이 놀라워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듣고 싶다.

사람마다 누구나 살아온 삶의 궤적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이 흙수저라고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머니께서 내가 5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린 나를 고아원에 맡기셨다.

새옷을 사 입히고 사진관에 가서 아버지와 사진을 찍고 아버지 손을 잡고 시외버스를 타고… 그 모든 과정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지만 그리울 뿐 원망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보육원에서 집에서보다 더 따스하게 자고 더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살 차이가 나는 형님이 나를 데릴러 와서 시집간 누나 집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가난은 기본이고 오해와 갈등, 지독한 외로움의 시기를 보냈지만 지금은 아내와 딸, 아들 이렇게 네 식구가 되었다.

네 식구가 11평 연립에서 전세로 살고 있지만 우리 가족 그 누구도 좁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 뭘 사 달라고 생떼를 부린 적이 없다. 어떤 때 서운할 정도다. 우리 딸이 외고를 다녔는데 수학여행지가 캐나다였다. 비용이 700만 원,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딸이 안 가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 학교에서 수학여행 안 간 사람은 우리 딸 하나였다. 아내가 비행기를 처음 타 본 것이 5년 전 제주도에 갈 때였다. 제주DPI에서 장애인영화제를 하는데 심사위원으로 와 달라고 해서 아내 비행기표만 사면 제주도 구경을 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아 큰맘 먹고 같이 갔었다. 내가 이렇게 남편으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는데도 그 어느 가정보다 끈끈하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 덕분에 초심을 지키며 일을 할 수 있다.

Q: 언론 이외 다른 일을 한다면 어떤 분야에서 헌신하고 싶은가.

할 줄 아는 게 없다.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2009년에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 원에서 공부를 한 것이 나를 위해 한 가장 큰 투자였다. 현장은 잘 알지만 전문가가 아니라는것 때문에 전문가 집단에서 소외를 당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주말은 도서관에서 살 정도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에 나사렛대학교에서 14년째 강의를 하며 제자들이 생겼고, 그들이 장애인복지를 비롯한 사회복지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보면 흐뭇하다.

장애인방송에 출연해서 장애인 뉴스를 심층 분석하는 방송도 강의 못지않게 중요한 활동이 다. 앞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에이블뉴스를 비롯한 장애인언론의 역할에 더 내실을 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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