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모세 군과 어머니 조영애 씨.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너무도 사랑스런 딸아이를 보면서 둘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선물처럼 둘째 아이가 찾아 왔다. ‘이번에는 아들이네요.’라는 말과 ‘아이가 작은 것 같으니 고기 많이 드시고 일주일 후에 오세요.’라고 덧붙였다.

아들이란 말이 왜 이리 기쁘던지. 나의 입술은 귀에 걸려 한참만에야 돌아왔고,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남편은 일주일 내내 통닭을 사 들고 퇴근을 하였고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신의 질투였을까? 임신 4개월 말경 초음파 검진을 통해 아이의 머리 쪽인지 산모의 자궁 쪽인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가 있는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을 받아 보라고 했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며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을 받았다. 병원 검진 결과는 참혹했다. 태아의 머리 후두부 쪽에 뼈가 형성이 되지 않아 구멍이 난 부분으로 ‘뇌’가 흘러나와서 아기가 살 수 없다고 했다. 의사의 말이 얼마나 잔혹했던지 그 입이 저주스럽기까지 하였다.

엄청난 결과 앞에 충격으로 나는 주저앉았고 나의 몸과 영혼은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버렸다. 산부인과 의사 전체회의 결과 산모도 위험할 수 있으니 빨리 낙태를 결정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아이의 태동을 느꼈고 인위적으로 그 생명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10개월을 채워 1992년 8월 4일 제왕절개 수술로 우리 아기는 세상에 왔다.

“보호자분 빨리 오세요!”

다급한 간호사의 말에 남편은 신생아실로 달려갔다. 신생아실 앞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참으로 머리만한 ‘뇌’가 뇌막에 쌓인 채로 밖으로 흘러 나와 있었다. 수술을 할 건지, 말 건지 빨리 결정하라고 다그쳤다.

“수술하면 희망이 있나요?”

“의학적으로는 1%의 희망도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 아이가 수술을 해서 산다고 하면 의학이 한 일이 아니라 신이 하신 일이겠네요?’라고 묻자 의사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기도할 테니 선생님은 최선을 다해 수술해 주세요.”

생후 3일 만에 핏덩이인 아기는 1%의 삶도 허락하지 않은 채로 아픔과 고통을 홀로 견뎌야 하는 대수술에 들어갔다. 수술 후에 의사는 말했다. 대뇌 70%, 소뇌 90%를 절단하여 이제 이아기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며 온몸에 장애가 너무 극심해서 얼마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잔인하디 잔인한 통보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술 3일 만에 아이는 온몸을 부르르 떠는 전신경련과 호흡곤란이 찾아왔고, 병원 측에서는 예상했던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이라고 했다. 주기적으로 그런 일은 반복되었는데, 우리 가족은 울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해 줄 것이 없었다.

차마 볼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이었지만 장하게도 아기는 잘 견디어 주었다. 우유 먹여 주는 일 외에 해 줄 것이 없다는 병원 측 말에 우리는 33일 만에 퇴원을 했다. 병원비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우리는 이사를 했다.

사선을 넘나들며 고통과 싸우던 아이를 컴컴하고 습한 지하방으로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아기 에게 너무 미안해서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에 눈물을 쏟았다. 아기의 모습은 가여우리만큼 비참한 모습이었다. 뼈에 가죽만 남아 비비 틀어져 있고, 머리 모양은 찌그러진 냄비 같았다.

우유 한 모금 제대로 삼키지 못해 배가 고파 우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동자는 마구 흔들려 눈을 마주할 수 없었고,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 보고, 현관문을 세게 닫아 보았지만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런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모습이라도 좋으니 살아서 내 곁에만 있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하며 사랑을 다해 보살펴 주었다.

18개월 때 뇌를 잘라낸 합병증으로 뇌수종이 찾아왔다. 머리에 관을 박아 그 관에 호스를 연결하여 목을 지나 위 속으로 뇌수가 흐르도록 수술을 했다. 네 번의 뇌수술과 두 번의 다리수 술, 여섯 번의 수술에도 아이는 잘 견디어 주었고, 아름다운 성품으로 성장해 갔다.

의학적으로는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온몸에 장애가 너무 극심해서 얼마살 수 없다던 의료진들의 말을 모두 뒤집고, 아기는 부족한 모습이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냈다. 다섯 살에 말문이 열려 우리 가족을 기쁘게 해 주더니 아름다운 성대를 선물로 받아 노래하는 모습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생명을 연장하는 대가로 지적, 지체, 시각장애를 가져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적지만 그런 너의 몸종으로 사는 지금 너무도 행복하단다. 엄마는 꿈을 꾸며 소망한다. 네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기를.”

“엄마,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세상을 무대 삼아 노래로 희망을 전할래요.”

그런데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2013년도 1월 29일 평창 동계 스페셜 올림픽!

110여 개국의 선수들과 4천여 명의 관중이 보는 가운데, 우리 아이가 애국가를 불렀다. 많은 이들이 감동하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 주었다.

“너의 연약함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모습이 되고 있구나. 그때 너를 포기했었더라면 너의 별이 사라졌을 텐데. 엄마 아빠의 선택이 역시 옳았어.”

얼마 전에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여 희망을 노래할 때 사랑스런 아이는 그 어느 별보다 더욱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너의 장애가 슬프지 않도록, 이 엄마가 끝까지 함께해 줄게.”

별에서 온 내 아이는 오늘도 누군가에 희망을 노래하며 빛나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아프지만 희망을 주는 별들로 인해 행복해지는 세상이 되기를.

* 이 글은 지난 10월 4일 서울시 후원으로 (사)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에서 개최한 발달장애 부모 힐링 백일장 ‘어머니 나르샤’ 장원 수상작품으로 글쓴이 조영애님은 백석예술대 성악과에 재학 중인 중복장애 1급 박모세 군의 모친입니다.

삼육재활학교 ‘장한 어버이상’ 수상. ‘어머니 나르샤 백일장 장원’ 수상. KBS-R 내일은 푸른하늘, KBS-TV 아침마당, CBS 새롭게 하소서, 극동방송 하나 되게 하소서, MBC 라디오스타, SBS 스타킹,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TV조선 시사토크 판, MBN 최불암의 어울림 이야기쇼, EBS 희망풍경 등 출연 및 인터뷰. 우간다 장애인학교 건립기금마련 행사 미국12개주 초청(플러튼 시장 명예시민증서) 및 샌프란시스코, 씨애틀, 캐나다 벤쿠버 장애사역 초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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