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3일 반시설과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9명의 장애인이 ‘국토대장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23일간 부산을 시작으로 창원, 울산, 대구, 대전, 인천 등을 거쳐 오는 9월 4일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전국을 돌며 장애인 시설의 문제점과 인권침해·유린 등의 현실과 장애인 자립생활 지원을 위한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릴 예정이다. 국토대장정을 공동주관한 한국장애인연맹(DPI)의 자료협조를 받아 긴 여정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8월 25일, 작성자: 이권희 (서울장애인인권포럼 대표) 대원

오늘은 행군 일정이 없고 어제 들어온 대전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제2기 국토대장정 팀은 ‘반시설과 장애인자립생활보장법 제정촉구’를, 대자연(대전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는 ‘장애인복지법 개정촉구’를 내용으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시민선전전과 서명전을 하였다.

대전시청에서 얼마 멀지 않은 갤러리아호텔 앞에 데스크를 설치한 후 대장을 중심으로 메가폰으로 서명동참을 외쳤고, 나머지 대원은 3인 1조씩 나뉘어 주말 쇼핑을 나온 시민을 대상으로 서명전을 전개하였다.

내용에 관계없이 중증장애인들이 진행하는 서명전이라 고생한다며 그냥 서명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뭣 때문에 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설명을 드리고 나면 아주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었다. 특히 울산 메아리 복지원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놀라기도 하고, 매우 분노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학생들의 경우 지나가는 친구들까지 불러 세워 서명에 동참하도록 유도해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경희 대원, 박정선 대원, 이권희 대원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여성 정신장애인 분이 지나가다가 서명에 동참했다. 그녀는 배경설명을 들은 후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도와주었고, 그냥 받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선물도 주셨다. 더울 때 땀 닦으라고 손수건 3장, 목마를 때 마시라고 생수 3통, 이렇게 만나 인연을 기념하는 열쇠고리, 건전지로 돌아가는 휴대용 소형 선풍기였다.

거절하였으나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정성으로 받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염치불구하고 받았다. 대신 점심을 같이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대전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은데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여 박정선 대원이 대전지역 여성장애인단체를 소개해 주겠다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오후 2시부터 갤러리아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백화점치고는 엘리베이터가 소형인데다가 주차장으로 직통하는 것과 각 층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구분되어 있고, 주말이라 쇼핑객이 너무 많아서인지 전동휠체어가 이동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2개조로 나뉘어 점심식사를 했는데도 오후 5시 가까이 돼서야 모든 대원들의 식사가 끝이 났다. 데스크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오후 7시가 조금 못되었다. 일부대원은 휴식을 취하고, 나머지 대원은 저녁식사를 했다.

도로를 따라 국토 대장정에 나서고 있는 대원들. ⓒ한국DPI

8월 26일, 작성자: 이권희 (서울장애인인권포럼 대표) 대원

숙소가 아침 일찍부터 부산해서 그런지 대원들이 오전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한명씩 기상을 했다. 숙소인 대전한밭장애인자립생활센터 부설 평생교육원의 원장님께서 손수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느라 그런 것이었다.

식당음식이나 배달음식이 아니라 손수 해주시는 밥이 오랜만이라 다들 기대도 했고, 공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짐도 싸야 했기 때문인지 불평하는 대원은 없었다. 오늘도 사건은 터졌다.

박정선 대원의 활동보조와 스텝역할을 너무 훌륭하게 수행하고 대원에서 빠진 박연순씨가 오전 7시가 조금 넘자 갑자기 숙소를 방문하였다. 다들 의아했다. 알고 봤더니 그동안 정이 들어 헤어지기 아쉽기도 했지만 자기 고향인 대전을 떠나는 날만큼은 손수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싶었다며 대원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사를 준비해 오신 것이었다.

그러나 부엌에서는 원장님이 식사를 거의 다 준비해두셨으니 대장님이 당황해 하신 것이었다. 박연순씨와 대장님 간에 사전 소통이 있었다는데 서로 다르게 이해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역시 우리의 박연순씨(우리 대원들은 모두 누님이라고 불렀다)가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행군을 같이 하다가 점심식사 때 내오기로 한 것이었다.

오늘부터 구간대원으로 참여한 권인자 대원(충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수동휠체어를 타시는 분인데 전동휠체어 운전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대전 시내를 빠져 나오는 구간은 수동휠체어를 타고 문경희 대원의 전동휠체어를 붙잡고 이동하고, 대전현충원에서부터는 전동휠체어로 갈아타고 이동했다.

이런 것이 동지애일까? 부담스러울 만큼 너무 고마웠고, 음식도 얼마나 맛깔나던지 강행군에 지친 대원들의 허기를 채우고 입맛을 돋우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점심식사 후 여느 때처럼 달콤한 휴식과 함께 전동휠체어 충전을 하였다.

34°가 넘는 정말 뜨거운 날씨였다. 바람도 없었다. 원래 예정된 행군거리는 31킬로미터였다.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싶었는데 갑자기 선두차량이 도로를 벗어나 우회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모든 대원들이 영문도 모른 체 우왕좌왕하였다. 오늘 숙소와 관련하여 대장님이 지역단체와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돌아간 거리가 9킬로미터. 우리의 이영석 대장님이 대원들에게 약점을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오늘의 최종목적지인 공주장애인복지센터에 오후 5시 쯤 도착하였고, 공주시 장애인복지과 과장과 계장, 한국지체장애인협회 공주지회장 및 임직원, 자원봉사단 회장님과 회원 등 약 15명 정도의 관계자분들이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날 행군시작 후 최장거리를 달렸다. 행군거리는 총 40킬로미터다.

출발에 앞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대원들 모습. ⓒ한국DPI

8월 27일, 작성자: 이권희 (서울장애인인권포럼 대표) 대원

어제의 과다한 약물치료(알코올 섭취)로 기상이 평소와는 다르게 30분 정도 늦었다. 대신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바로 출발하여 행군도중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전 8시 30분에 출발을 위해 대원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있는데 어제 우리를 맞아주었던 기관 관계자분들이 출근을 하시면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월요일이라 정례회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임직원들이 환송까지 해주셨다. 양쪽으로 도열한 임직원들 사이를 대원들이 뚫고 행군은 시작되었다.

전동휠체어 배터리가 충전이 되지 않았는지 권인자 대원의 휠체어에 문제가 생겼다. 수도휠체어로 갈아탔다. 오늘도 역시 문경희 대원이 어제에 이어 권인자 대원의 수동휠체어를 끌었다. 수동휠체어가 전동휠체어에 매달려 갈 때 생각보다 팔 힘이 많이 들어가는데 권인자 대원이 안쓰러웠는지 문경희 대원은 오른손으로 전동휠체어를 운전하면서 왼손으로는 권인자 대원의 수동휠체어 손잡이를 잡는 방식으로 나란히 달렸다.

그렇게 1시간 30분 정도를 진군했을 무렵 이정표에 오늘의 목적지인 공주시 정안면이 나타났다. 설마 했다. 벌써 도착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벌써 도착한 것이었다. 총 거리 15킬로미터. 평균시속 10킬로미터로 빠르게 전진했으니까, 1시간 30분이면 15킬로미터가 딱 떨어진다. 물론, 공주에서 천안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으나 그 거리가 50킬로미터 가까이 되기 때문에 배터리 문제로 한 번에는 가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중간에 정안면을 거치기로 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짧은 거리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았던 터라 오후 내내 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뜨기도 했다.

오전 10시 30분에 정안면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님께 인사드리고, 화장실을 이용하고,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작년 1기 대원들이 이용한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으라며 쌈짓돈 3만원을 후원해 주셨다. 그러나 점심식사 후 숙소로의 이동명령이 떨어지질 않았다. 또 무슨 일인가 했다.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지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점심식사 마친 시간이 12시 30분. 오후 3시까지 충전시간을 주시겠다는 대장님의 말씀. 순간 대원들의 머리를 스치는 혹시나 하는 생각. 역시나 그 생각이 맞았다. 충분한 충전으로 거의 완충에 가깝게 배터리를 채운 다음 정안면에서의 1박을 하지 않고 바로 천안으로 점프하자는 것이었다.

초강력 태풍이 내일이면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상당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기상예보가 있었는데 만일 이 태풍을 정안면에서 천안 간 행군일정인 내일 만난다면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예정대로 정안면에서 1박을 하고 내일 하루 더 태풍을 피하던가, 아니면 지금 계획대로 천안으로 점프하여 천안에서 태풍을 피하던가 말이다. 대장은 후자를 선택한 것 같았다.

순간 대원들 간에 긴장감이 흘렀다. 정안면에서 천안까지의 거리가 약 30킬로미터였기 때문에 총 행군거리가 45킬로미터로 어제의 기록을 다시 갱신한 최장거리 구간이며, 날씨 또한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이었기 때문에 체력소모 또한 만만치 않고, 경사가 급하거나 거리가 긴 고갯길과 터널 등 악조건이 군데군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장님도 걱정이 되셨던지 대원들의 의견을 일일이 물어봤고, 한 치의 기다림도 없이 모든 대원들이 동의했다. 문경희 대원(인천DPI 회장)은 9월 2일 인천에서의 결의대회 중간점검 차원에서 인천으로 올라갔다. 하루나 이틀 후에 다시 결합하기로 했다.

문경희 대원이 타던 전동휠체어를 권인자 대원이 대신 탔다. 어제 하루 연습한 것 치고는 운전 실력이 대단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최고속도의 행군에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하승철 대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허리통증을 호소하며 몸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순간적인 담이 온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행히, 정안면 면사무소에서 휴식을 취할 때 보건소에서 약을 처방받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약효가 바로 나타나지 않으니 상당거리 동안은 정말 힘든 행군이었을 것이다. 얼음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탈수현상도 심했다. 거리가 있어서 잦은 휴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천안시내에 진입했다. 천안시내에도 뭔 놈의 오르막길이 그렇게 많은지, 퇴근시간과 겹치면서 차량도 급증하였다. 신호마다 멈춰서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어 피로는 더했다.

이번에는 배재현 대원에게서 문제가 생겼다. 지루한 국도 행군, 복잡하고 위험한 시내 행군에 피로까지 겹쳤는지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본인은 똑바로 간다고 가지만 뒤따르던 대원들은 좌우차선으로 돌진하는 배재현 대원을 향해 고함을 지르느라 바빴다. 아무리 경고를 주고 사인을 줘도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최종목적지를 2킬로미터 앞둔 지점에서 배재현·권인자·이권희 대원, 후미 스텝차량만 남고 나머지 본대원은 그 속도를 유지한 채 먼저 떠났다.

무수히 많은 차량 속에 갇힌 채 시속 2킬로미터의 속도로 권인자 대원 등이 옆과 뒤를 받치며 한발 한발 나아갔다. 그래도 진행방향이 꿈틀거렸다. 후미차량에 탑승한 조용원 스텝이 결국은 차에서 내려 배재현 대원이 타고 있는 전동휠체어를 걸어가면서 대신 운전하기에 이르렀다. 가다보니 끝이 보였다. 무사히 도착했다. 미리 도착한 대원들이 마지막 대원들을 환호와 박수로 맞아주었다.

오늘의 숙소는 천안시장애인보호작업장이었다. 원장님과 임직원이 맞아주었고, 나중에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한국DPI 채종걸 전 회장님이 지지방문을 해주셨다. 저녁은 숙소에서 제공해주셨고, 채종걸 전 회장님은 정성스레 달인 한약을 전달해주셨다. 천안시 한빛회 박광순 회장님도 방문해서 격려해주셨다.

천안시에 소재하고 있는 지적장애 특수학교인 인애학교에서 성폭행 및 성추행 사건이 이슈가 되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지역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어 생활하는 중증장애인의 인권과 복지증진을 위해 시설을 반대하고 장애인자립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 제2기 국토대장정 팀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울산에서의 메아리 복지원 사건처럼 사건자체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가 명확한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의 공방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섣불리 판단하고 행동할 수 없는 부담은 있었다.

우리 팀의 천안 입성 소식을 듣고 인애학교사건 대책위 김난주 위원장과 학생들을 상담했던 박두순 성폭력상담소 소장님, 인애학교 학부회 회장님 등이 방문하셔서 늦게까지 사건경과와 지금까지의 활동, 향후 계획 등에 대해 우리 대원들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건은 인애학교 교사가 지적장애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나아가 성폭행까지 했다는 내용이었다. 제2의 도가니 사건이었다. 현재 검찰이 기소하여 1심 재판이 진행 중에 있고, 이미 13차례의 변론이 있었다고 한다.

지적장애 성추행 및 성폭행 사건이 매번 그렇듯이 정황증거가 미비하고 피해자의 진술이 정확하지 않거나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등 난항이 있어 선고결과가 어떻게 내려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란다.

어차피 내일은 태풍으로 인해 숙소에서 머물러야 할 상황이다. 취합된 내용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상여부에 대해 최대한 판단을 내리고, 힘을 보탤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아무쪼록 이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파악되고, 피해자가 있다면 구제되어야 할 것이며,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인데, 이는 법적 공방과는 상관없이 천안시, 나아가 우리나라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합해 확보해 나가야할 과제일 것이다. 우리 제2기 국토대장정 팀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오늘의 행군거리는 총 45킬로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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