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맹학교에 재학중인 조은산(남, 18세, 시각1급) 학생이 호소문을 읽고 있다. ⓒ에이블뉴스

“저희 시각장애학생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정기고사에서 수학문제를 모두 암산으로 풀어내야 하고, 국어나 영어의 긴 지문을 손끝으로 더듬더듬 만져서 거의 한 번에 외우다시피 해 시간에 쫓겨 겨우 풀어내고는 자책의 수렁에 빠져듭니다. 개개인의 실력과 기량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저희는 이것을 다 저희가 못난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한 문제 한 문제로 대학과 전공이 바뀌는 수능시험에서 수학 방정식 문제를 암산으로 푸는 학생이 있다. 국어와 영어의 긴 지문을 한 번만 읽고 푸는 학생이 있다. 바로 수능시험에서 전자기기라는 이유로 보조기기를 사용할 수 없는 시각장애학생들이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 민주당 박홍근 의원, 한국시각장애인가족협회와 함께 22일 오후 2시 이룸센터에서 ‘수능시험 편의제공 개선을 위한 시각장애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증언대회에 모인 시각장애학생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점자문제지와 녹음테이프를 이용해 문제를 푸는 어려움을 토로하며 시각장애인 대부분이 사용하는 ‘한소네’를 수능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한소네’는 비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일반 문서 파일을 쉽게 점자화 또는 출력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시각장애인용 점자단말기다. 텍스트 파일을 '한소네'로 전송하면 내용이 곧바로 점자디스플레이로 출력돼 다른 작업 없이 파일의 내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대학수능시험에서는 전맹인 학생에게 점자 문제지와 1, 3, 4교시 녹음 테이프, 1.7배의 시험시간 연장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시각장애학생들의 호소가 끊이지 않고 있다.

수능시험에 응시했던 한성현(사진 좌) 군과 박인범(사진 우) 군이 발언하고 있는 모습. ⓒ에이블뉴스

지난해 수능시험에 응시했던 한성현(남, 20세, 시각1급)군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시각장애학생들에게 수능시험에서 점자시험지나 전맹인 경우 1.7배의 연장시간 등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지만 이러한 것만 가지고서는 정안인들과 경쟁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군은 “수능시험에서 수학시간의 경우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많다”며 “정안인인 친구들이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필산하는 것과 시각장애인이 점자판과 점자지를 가지고 필산을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수학문제를 점자로 필산하는 경우 생각한 내용을 쓰고 읽기위해서는 점자지를 빼고, 끼는 작업을 반복해야 하고, 쓰는 시간도 오래걸린다”며 “점자를 이용해 식을 고쳐야 할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한 군은 “수능시험장에서 ‘한소네만 있었어도…’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한소네만 있었어도 쓰면서 읽는 문제, 속도문제, 수정하기 문제 모두가 한 번에 해결됐을 것”이라며 “시각장애의 특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도록 한소네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같은 해 응시했던 박인범(남, 20세, 시각1급) 군도 “지문이 많은 국어영역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노력해봐도 보이는 학생들 이상으로 점자를 빨리 읽는 것은 어렵다”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녹음테이프의 경우 많은 시간이 절약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ㄱ, ㄴ, ㄷ과 같은 기호를 사용하는 문제의 경우 점자 시험지로 바꾸어 제공하게 되면 지문만 3p, 문제까지 합하면 6p에 달하게 된다. 정안인의 경우 지문에 보기 좋게 밑줄을 긋는다거나 간단한 메모를 할 수 있지만 시각장애학생들에게는 쉽지가 않다

박 군은 “시각장애가 있는 학생이 점자문제지 또는 미니 카세트로 ㄱ, ㄴ, ㄷ과 같은 기호를 사용하는 문제를 풀 경우 기호를 다시 확인하려면 원하는 기호가 나올 때까지 손으로 훑어가면서 읽어야 하고 미니카세트도 되감았다 빨리 감았다하길 반복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한소네를 이용해 문제를 풀면 상당부분 문제가 해결된다”며 “한소네 자체에 마크를 설정해 책갈피를 끼워 문자열을 찾을 수 있고 자기만의 표시를 해놔서 그곳만을 읽을 수도 있다. 시험보기에 편하고 시각장애인도 자기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희망을만드는법 김재왕 변호사는 “시험에서 장애를 가진 학생에게 어떠한 편의를 제공하는냐는 그 학생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하며 “로스쿨을 준비하던 당시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에서 스크린리더가 설치된 컴퓨터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현재 수능시험에서는 전맹인 학생에게 점자 문제지와 녹음테이프 및 1.7배의 시험시간 연장을 제공하고 있지만 거의 모든 전맹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그렇지 않다고 호소하고 있다”며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정당한 편의제공’에 따라 전맹 학생들이 공부에 익숙한 보조기기를 수능시험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고은영 씨는 점역교정사 시험에서 전자기기인 한소네를 도입해 활용하는 사례를 소개하며 행여 있을지 모르는 ‘부정행위’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고 씨는 “한소네의 개발로 여러 기능들이 추가돼 시험에 필요한 입력기능 만을 위한 수검용 버전을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며 “수검용 버전 사용 시 무선인터넷, 역점역, 영어 점역시 약자프로그램, 계산기 등의 사용이 방지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점역교정사 시험의 경우 수험생들은 시험 1시간 전 입실해 한소네를 포맷하고, 프로그램 설치 및 부정행위에 대한 각서를 작성하는 등 시험에 응시한다”고 덧붙였다.

희망을만드는법 김재왕 변호사가 장애인차별금지법 상 '정당한 편의제공'을 위해 수능시험 편의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고은영 씨가 점역교정사 시험 사례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22일 오후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수능시험 편의제공 개선을 위한 시각장애학생 증언대회' 전경.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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