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식 전 유엔장애인권리위원.ⓒ에이블뉴스

지난 2008년 가을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회정책‘이라는 200여 페이지의 책을 출판을 목적으로 탈고했다가 출판을 포기한 적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한 물 간 것 같기도 했고, 특히 사회복지계에서는 아무도 학회지에 이런 주제로 논문도 없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쟁점과 의제를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제안은 아니지만, 적어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이해는 급변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知的) 기반을 제시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었다. 나름대로 공부도 많이 했고 얻은 것은 많았다.

오늘의 에이블뉴스에 계속 투고한 ‘편견과 차별’의 주제와 관련하여 미셀 푸코(M. Foucault)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라는 두 철학자가 생각났다.

푸코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힘 있는 지배적인 주류가 칭하는 타자(Others)라고 부르는 범주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필자는 장애인과 모든 차별의 대상을 ‘타자’라고 인식했다.

여기에서 타자란 "그동안 의식 때문에 억압받아 온 무의식과 잠재의식, 중심문화 그늘에 가려진 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던 주변 문화, 언어의 표층 구조에 묻혀 있던 언어의 심층 구조 따위가 새롭게 그 가치를 주목받는, 혹은 재발견 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약간의 비약 일 수도 있지만 소위 장애학을 포함하는 사회복지는 본질적으로 소외의 문제, 한계·취약계층의 문제, 빈곤, 비행, 일탈, 무 권력층(the powerless), 불행하게 억압받는 자아’의 현상이 핵심과제라는 차원에서 타자의 학문이 아니었던가?

크리스테바에 관심이 간 것은 장애에 관한 한 논문에서 '극도로 비참한, 절망적인 장애'라는 철학적 논문을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소 딱딱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나 한국의 장애학에서 한번 짚어주었으면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래의 신문기사가 왜 필자가 편견과 차별의 문제를 집요한 우리사회의 문제로 계속 신랄하게 다루는가를 입증해 준다. 독자들에게 죄송하지만 두 기사를 발췌한다.

"한국인 10명 중 7명은 한국 사회의 차별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첫 인권실태조사 결과는...한국 내 차별의 심각성에 대해 ‘매우 심각’이 13.7%, ‘다소 심각’이 55.4%로 총 69.1%의 응답자가 ‘심각.. ‘별로 심각하지 않다’와 ‘전혀 심각하지 않다’는 각각 29.2%와 1.6%였다. 한국에서 인권침해와 차별에 취약한 집단(2개 응답)으로는 장애인(29.7%)이 가장 많이 꼽혔다. 이어 이주민(16.4%), 노인(13.4%), 여성(13.2%) 순이다."(2020. 6.20)

다른 기사는 ‘혐오와 한국교회’인데, 이 책에 나오는 한국의 개신교는 ‘혐오의 온상’이다. 목사와 신도들은 억울하다고 분통을 터뜨릴지도 모르겠지만..동일성 지향’(동성애) 등 성소수자와 북한, 공산주의자, 여성, 장애인, 세월 호 유족까지 한국 개신교가 혐오하는 대상은 광범위하다. 오! 한국의 교회가 어쩌다가.... 어차피 한국사회는 현재 차별금지법은 성별, 성 정체성, 신체조건, 병력, 외모, 나이, 국가, 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지역, 종교, 사상, 학력, 사회적 신분상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지지한다.(한겨레 2020. 06.24).

크리스테바는 원래 1941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196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의 탁월한 구조주의, 포스트 모턴 페미니스트, 문학비평가, 정신 분석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철학자였고 파리 Diderot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대개의 페미니스트와 마찬 가지로 크리스테바에게 있어서의 핵심적 문제는 여성의 억압과 여성을 ‘대수롭지 않은 존재’이며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려는 문화적 조작에 대한 항거의 지속이었다. 장애의 고질적 문제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 글에서 필자는 크리스테바가 어떻게 ‘소외와 배제’를 다루었는가를 살펴보려한다. 그러기위해서 그녀의 에세이 중 ‘자유, 평등, 동료애...취약성’과 ‘비극과 꿈: 장애의 재방문’을 발췌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녀가 도입하는 ‘극도로 비참함 abject'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장애에 대한 억압'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본래 크리스테바는 '비참함'이라는 개념을 대중적 문화 담론에서 여성, 미혼녀, 소수 종교 신봉자, 몸을 파는 여성들, 장애인, 공포, 차별적 행위, 동성애 혐오, 대량학살 등의 특수 사회집단으로부터 '폐기된, 저버린, 버림받은' '이상하고도 괴이한' 현상과 연계하여 사용하였다. 본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발전된 18, 19세기의 개념이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일단 이야기를 멈추자. 하나의 이론이지만 장애의 ‘비참함’을 수용하지 않고 분노할 독자들도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필자도 장애인이지만 결코 비굴하거나 비참하게 살지 않은 당당한 장애인들도 무수하다. 반드시 헬렌켈러나 루즈벨트, 김대중 대통령, 케임브릿지 대학의 호킹스 박사 등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에이블뉴스에서 읽었던 '장애를 당당히 드러내고 즐기는 사회가 되길'이라는 통쾌하고 재미있는 코미디언의 이야기처럼 모든 장애인의 삶이 비참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사실 장애인들은 스스로 ’비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남들이, 타자(他者)가 그렇게들 이야기 한다.

비참함과 연계되는 차별은 아브라함 마슬로우 욕구의 최종 단계인 ‘자아실현’을 좌절시킬 뿐 아니라 물리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신적 삶의 구조를 비정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 개인의 삶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크리스테바가 의미하는 ‘자아와 타자’를 붕괴, 분리시킨 물리적인 현실이다. 마치 소외와 배제의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 장애인의 삶처럼...

장애를 극도로 비참하다는 주장, 혹은 관찰은 왜 비장애인들이 장애인과 섞이기를 꺼려하며 억압하며 ‘특수학교, 특수 시설’을 만들어 사회 저변으로 밀어내는가를 설명해 준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마지막 부분을 최근 장애계의 사회적 모델, 인권 모델이 타자에 의한 동정이나 억압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의 생각 속에 부각시켜준다는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즉, 위의 두 모델이 크리스테바의 고뇌를 풀어준다고나 할까? 그러나 오늘의 주제는 필자가 주장해 온대로, 그리고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주장하듯, 변화의 대상은 사회이지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 장애를 저 변화 시키고 차별하는 강압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반항해야 한다.

생소하지만 포스트모던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목적은 푸코나 크리스테바가 장애학계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주제를 많이 다루었고, 억압과 차별의 실체인 권력, 신체, 규제(시설 화 등의), 감독, 정상화 등의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개념들을 사회복지·장애학에 적용시킬 때 새로운 통찰력으로 이어지는 가능성을 본다.

특히 푸코의 권력의 개념은 소유할 수도 남에게 양도할 수도 그리도 교환할 수도 없는 외면 성을 가지고 있다. 권력은 모든 인간관계 속에 연결고리처럼 엮어져 있으며(Foucault, 1979) 지속적으로 행사된다.

실로 권력관계는 없는 곳이 없다. 인간의 모든 관계는 남편과 아내, 학생과 교수, 의사와 환자, 장애와 비 장애 등과 같은 권력 관계이며 국가와의 관계처럼 단순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피상적이나마 푸코의 정치적 성향이나 그가 관심을 가졌던 핵심적 주제를 사회복지·장애 학의 주제와 연결시켜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도전적인 요소는 억압받는 음성의 사람들을 위하여, 한계권으로 밀려나 있는 그들을 중심으로 끌어 들여서 중심을 흔들어 놓으므로 실제적인 추론이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전략적 목적을 위하여 논쟁의 대상도 될 수 있고 의미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기여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푸코의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사회복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법과 법률이론 분야에서도 비판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스마트(Smart, 1989)는 ‘페미니즘과 법의 힘(Feminism and the Power of Law)이라는 저서에서 진실, 권력, 지식, 등과 같은 푸코의 개념을 사용하여 어떻게 법이 권력을 행사하며, 용납될 수 있는 대안적 사회현실을 기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가를 보여준다.

법의행사는 마치 병원에 치료를 하러 갔다가 병을 얻듯이 문제의 해결보다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장애인 고용 법에 의하여 300명 이상의 작업장에 2%의 장애인을 취업토록 하는 규정 때문에 소위 고용 인원을 채용하지 못해 부과하는 ‘병신 세’라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악화된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비슷한 예는 아동학대, 강간 그리고 복지·장애 서비스의 전달분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법률은 단일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전략, 정책만을 구상하거나 개별적인 법률 개혁을 통하여 어떤 결과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집요하게 장애의 개념, 차별금지, 법적 권한, 법 앞의 평등 등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필자는 1980년 대 초 호주 모나쉬대학에 재직 중 ‘어떻게 법률이 장애인에게 더욱 장애를 부과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필자의 소박한 기대는 한국의, 세계의 장애계가 ‘장애와 사회’라는 개념을 둘러싼 새로운 이해와 논쟁이 일어나도록 사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은 개혁적이고, 도전적이고 급진적인성격임을 장애계는 외면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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