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가져온 ‘도가니 사건’과 ‘염전노예 사건’ 피해자들은 재판관 앞에서 조차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적장애인인 피해자의 의사를 말살하는가 하면, 끔찍한 성폭력 사건을 “소멸시효”란 단어로 간단히 정리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28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2015 장애인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발표회’를 개최, 선정위원회가 선정한 디딤돌 판결 10건, 걸림돌 판결 8건을 발표했다.

장애인인권만을 주제로 하는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은 이번이 처음으로, 장애인인권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변경되거나 진일보한 판결을 디딤돌로, 다소 미흡하다고 판단되는 판결을 걸림돌로 선정했다.

선정대상 판결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이 적용된 모든 판결과 지난 2014년 1월부터 2015년 5월 사이에 선고된 판결로 헌법재판과 하급심판결을 모두 포함한다.

‘2015 장애인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발표회’에서 걸림돌 판결을 발표하는 이정민 변호사.ⓒ에이블뉴스

■도가니, “소멸시효”로 끝나다=최근 몇 년간 장애인계에 가장 큰 충격을 던져준 ‘도가니’, 즉 광주인화학교 사건이었다. “국가의 책임이다”는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에게 법원은 두 번의 아픔을 줬다.

“국가, 지자체의 관리감독 의무 소홀이다” 원고들은 수사상 과실, 광주광역시 공무원의 명예훼손 또는 모욕, 교육권‧학습권 침해 등을 들어 국가, 광주시, 광주시 광산구를 상대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소멸시효” 판단만을 내렸다.

‘도가니’ 판결은 피해 장애인들이 놓여 있는 상황과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소멸시효에 관한 법률을 단순 문리적으로 해석, 적용해 피해자들의 구제의 길을 막았다.

여전히 성범죄의 피해 하에 고통 받고 있는 교육시설 내 장애인들의 실효적 구제를 어렵게 만든 대표적 걸림돌 판결로 선정되는 오명을 받아야만 했다.

■법원에서도 ‘찬밥’ 염전노예=4000평 규모의 염전 속에는 ‘노예’라고 불리던 장애인이 있었다. 임금도 주지 않고 염전에서 일을 시키고,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얻어맞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던져준 ‘신안 염전노예 사건’이다.

10년 넘게 노동력을 착취한 염주들의 솜방망이 처벌은 물론, 최저임금으로 계산한 금액만큼 피해변제가 됐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이 쏟아져 나왔다. “지역적 관행”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묵과됐다.

특히 걸림돌 판결로 선정된 이유는 형사재판과정에서 조차 지적장애인인 피해자의 의사가 말살됐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합의서 또는 처벌불원서를 제출하지 않는 이상 재판부는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지적장애1급의 장애인임을 알면서도 의사 확인 여부를 거치지 않고 변호인이 제출한 처벌불원서의 내용을 반영시켜 판결을 선고했다.

특정후견인과 피해자들의 노력으로 항소심 법정에 피해자를 직접 세워 진의가 밝혀져 항소심에서 바로 잡을 수 있었지만, 법원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했지만 여전히 밝혀진 바 없다.

■시각장애인 선거권 외면하다=“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형 선고공보가 임의사항은 선거권 침해다.”

시각장애1급인 A씨는 점자형 선고공보의 작성 여부가 임의사항, 면수 제한에 대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지만 헌법재판소는 5인의 재판관의 합헌 의견에 따라 청구를 기각했다.

시각장애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선거권을 가지며, 이를 위해 후보자의 인적사항 및 공약에 대한 충분한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점자형 선거공보를 의무화하지 않는 것은 시각장애인의 선거권, 비장애인과의 관계에서의 평등권이 침해되는 것으로 생각할 여지가 커 보인다.

따라서 ‘걸림돌’ 판결로 선정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권은 국민 주권과 대의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핵심적인 수단이므로 이에 대한 기본권은 충분히 보장돼야 한다.

이외에도 시외이동권 국가와 지자체 책임 기각, 보호의무자에 의한 정신병원 강제입원에 관한 헌법소원심판청구 각하 등이 걸림돌 판결로 함께 선정됐다.

28일 ‘2015 장애인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발표회’에서 디딤돌 판결을 소개하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상임대표.ⓒ에이블뉴스

■“의족은 신체의 일부” 끈질긴 싸움=반대로 장애인인권 관점에서 진일보한 ‘디딤돌 판결’, 그 첫 번째는 ‘의족 사건’이란 불리는 대법원 판결이다.

1995년 교통사고로 의족을 장착한 B씨.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중 사고를 당해 요양급여 신청을 했지만 불승인 당했다.

2심에서도 마찬가지로 “의족은 신체의 일부로 보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기각당한 B씨. 결국 끈질긴 법정싸움 끝에 지난 2014년 대법원은 “신체의 일부”라며 원심판결을 파기했다.

장애인에게 있어 보장구는 신체의 일부와 같이 몸의 기능을 대신해 준다. 이번 판결은 장애인에게 보장구는 신체의 일부로서 당연히 인정돼야 한다는 인식의 첫 출발이 됐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청각장애인이 손가락을 잃은 것은 목소리를 잃은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장구 역시 장애인의 확대된 신체의 일부로 이해돼야 함을 인정한 판결이다.

■잘못된 ‘범인’, 국가의 책임=“얘가 범인입니다” 17세의 여자 청소년인 지적2급 C씨는 한 사람의 거짓자백으로 영아유기치사 사건의 피의자로 긴급 체포됐다.

담당 경찰관은 거짓자백만 믿고 범행을 추궁했고, 겁에 질린 C씨는 얼떨결에 범행을 시인한 것. DNA 검사 결과 사건과 무관하다는 통보를 받았던 C씨, 그의 어머니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했고, 끝내 법원은 C씨에 손을 들어줬다.

‘디딤돌’로 선정된 이 판결은 수사기관에 대해 장애인에 대한 조사 전에 장애의 유무와 장애의 정도 등을 적극적으로 확인해 진술의 임의성이 실질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상황에서 조사를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기 있다.

또 장애인에게 실질적인 권리보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가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시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됐다.

■장애등급, ‘절대적’ 아닌 이유=“백반증은 장애가 아닙니다” 1991년 충남 보령시청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던 D씨는 백반증으로 2006년 안면부 3급 장애인으로 등록했다. 하지만 2011년 심사절차가 강화된 후 장애인등록이 취소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D씨는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보령시장을 상대로 장애등급을 다시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냈으며, 법원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D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판결이 ‘디딤돌’로 선정된 이유는 장애등급판정기준이 장애의 유형에 있어 ‘하나의 기준’에 불과함을 확인시켜준 의미 있는 판결이기 때문이다.

현재 규정돼있는 장애유형 및 장애등급판정기준을 엄격히 해석한다면 불합리한 결과를 초과하는 것. 향후 장애개념이 의학적 접근에서 벗어나 생활상의 장애로 발전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는 뜻 깊은 판결이다.

이외에도 충분한 조사를 거치지 않은 사회복지서비스변경신청거부처분 위법성 인정, 진술거부권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를 부정한 판결 등이 함께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한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디딤돌‧걸림돌 선정 사업을 내년에도 지속할 예정이며, 기존의 법령이나 제도 개선 사항이 발견될 경우 정책제안이나 입법 활동 등 적극적인 활동도 병행해나갈 계획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28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2015 장애인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발표회’를 개최, 선정위원회가 선정한 디딤돌 판결 10건, 걸림돌 판결 8건을 발표했다.ⓒ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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