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식 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 ⓒ에이블뉴스DB

어렵지만 한번쯤은 짚어보고 싶다는 주제였다. 한번은 아일랜드 국립대학 법학과로부터 이 주제에 관한 국제 장애 전문가들의 토의에 참여해달라는 초청도 받았으나, 분명한 입장보다는 자칫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 같아 적당히 사양한 적이 있다.

장애와 관련된 일상적인 주제로, 때로는 산전 진단, 임신중절과 관련하여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로 간주되기도 한다. 어쨌든, 쟁점 자체가 혼란스럽고 정리가 잘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크게는 우생학과 장애에 관한 논쟁으로서, 유엔위원회에서도 주로 여성의 임신중절에 관해서만 논의 했을 뿐 ‘장애 예방’이라는 운이 떨어지기만 하면 상당한 공격,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2014년 한국의 국가보고서 심의에 참여 하였던 시민사회 대표단 중에도 장애 예방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필자도 전문적인 견해는 피력할 수 없으나, 장애학계, 의료계 재활의 학계 생명 윤리학의 차원에서 한번 쯤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로 던져본다.

이 기고문에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장애 예방과 장애권리는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이다. 실제적으로는 여성의 강제 임신중절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우리의 입장은 얼마나 잘 정리 되어있는가? 일단 잠정적인 응답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산전 진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때로는 상황에 따라 임신중절을 통한 유아 살해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생명 윤리 문헌, 그리고 장애 권리 운동권에서는 임신중절의 실용주의의 입장에 대해 강력하게 반론도 제기했다.

특히 장애 권리 운동가/이론가 들은 현재 서구에서 뿌리 내리고 있는 우생학과 장애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와 사회적 지지에 대하여 상당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소위 긍정적 우생학은 ‘바람직한 특성’의 재생산, 부정적 우생학은 ‘바람직하지 못한’ 재생산 구별로 서로 논쟁을 피한다는 비난도 받는다.

그 외에도 ‘자발적’인 임신/출산 중단, 그리고 교육, 자문, 권고 등의 영향을 받는 낙태, ‘강제적’ 임신/출산 중단이 무제의 핵심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장애 계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해도 출산 전의 진단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정책적으로나 의학에서 크게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우생학 담론은 이렇게 입장을 취한다. 20세기에는 우생학이 다분히 이념적 차원이었다면 21세기의 우생학은 유전 공학으로 발전해 있다는 것. 유전 공학의 문헌에서는 유전공학이 이제는 논리정연하게 발전하여 장애 원인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장애 인식의 실천’이라는 국제 장애운동의 뉴스레터의 부록의 내용 중에, ‘아주 효과적인 기술적 방법으로 산전 및 산후에 장애 원인을 규명하여 제거할 수 있다’라는 기사가 있었다.

영국의 한 유명 대학에서는 ‘인간유전공학’ 센터가 막강한 재단으로 지원을 건립되어 ‘나치의 우생학은 물러가라’는 시위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실제로 나치즘 하에서 얼마나 잔인하게 잔인하고 효율적으로 장애인을 제거했는가는 충분한 사료가 뒷받침하며 너무나 빈번하게 대두되는 잔인한 문제이다.

실제로 미국, 독일, 캐나다,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우생학이 성행해서 전체 국민의 5%가 임신중절을, 전쟁 돌발 후 2십만~2십7만 5천명에 대해 우생학적 조작이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이 지적장애 혹은 학습장애인이었다. 의료계가 나치의 우생학 정치의 최전방에 있었다.

실제로 산전, 산후 임상적인 의료 검사가 많이 실시되는데 그들을 모두 나치와 연결시켜 무분별하게 나치의 우생학과 현 시대의 의료실무와를 비판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현대의학은 우생학적 차원에서, 혹은 순수한 인류를 위해서, 혹은 어떤 인종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의료적인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유엔위원회에서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 보다는 현대 여성 장애인들이 당면하는 임신중절, 그것도 강제 임신중절이 가장 빈번히 대두되는 논의와 심의 대상이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떠한 형태의 우생학. 그리고 임신과 출산중단, 특히 강제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우생학과 강제적인 임신과 출산중단은 다분히 음모적이라는 것이 장애 운동가들의 관점이었다.

산전 진단 그 자체는 태아와 손상(장애)에 대한 편견의 발로라는 것. 산전 진단은 한마디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며, 아예 애당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간혹 이것을 ‘표출된 거부 행위’라 하는데, 유전적 진단과 선별적인 임신중단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태도를 분명히 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천적 장애인이 행여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나의 부모가 유전공학이나 유전검사가 발달하여 나의 출생을 중절했더라면 나는 이대로 세상에 존재 했을까?’하는...‘행여 나의 부모가 유전공학의 혜택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 말이다.

문제는 유전공학의 혜택이 가정과 사회에 장애인을 거부하는 풍조로 이어질 우려를 갖게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실로 고통스럽고 두려운 생각을 갖게 하고 실제로 부딪치는 편견과 차별, 혐오의 언어 속에서 상상력이 실제로 나타난다.

자, 그렇다면, ‘표출된 거부 행위’ 에 반대하여, 장애를 예방하는 것은 반드시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는가?

장애를 피하기 위하여 유아들에게 시술되는 각종의 예방주사, 지뢰제거운동, 끔찍한 장애를 묘사하는 교통사고 방지 광고 등은 분명히 장애 예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소아마비, 신체 절단 자, 교통, 산업 사고 등 각종 사고로 인한 장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지는 않는다.

사고/장애 예방은 어느 사회나 불가피하다. 동시에 장애 예방이 반드시 이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를 표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질병을 피하기 위한 출산 전 의학적 진단과, 산전 진단에 따른 ‘치료’ 혹은 장애 유발의 원인이 되는 태아를 제거하기 위한 ‘임신중절’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나, 우리의 혼란을 완전히 해소해주지는 못한다.

필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표출적인 거부가 반드시 손상을 줄이는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임신중절이라는 방법으로 손상을 줄이려는 의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신중절과 관련된 복잡하고 도덕적 문제는 이 짧은 기고문으로 언급하기도 부족하다.

철학자 중에도 견해가 분분하지만, 필자는 아래의 두 입장은 수용하는 차원이다. 즉, ‘모든 생명은 잉태의 순간에 이루어짐으로 모든 임신중절은 안 된다는 첫째 관점과, ’태아는 사람이 아님으로 여성이 자발적으로 결정하면 임신중절은 허락될 수 있다‘는 두 번째 관점이다.

또 하나의 관점은 반대도 거부도 아닌데,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러 가지 정황상((직장, 경력, 개인의 미래의 계획 등으로) 출생시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장애운동가 중에는 태아는 이미 ’인간‘이므로 자궁 안에 있는 배아나 태아를 죽이는 임신중절은 살인행위라고 주장한다.

어떤 경우에도 임신중절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여권 운동가들은 태아는 여성 신체의 일부임으로 오직 여성만이 임신 상태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돌이켜 보건데, 미국은 1927년 Buck vs Bell 의 고등법원의 판례에서 정신 지체인에 대한 임신중절은 헌법상 타당하다는 판결을 했다. 이 판결은 사실상 ‘정신박약’에 해당하는 정신지체인의 강제 임신중절을 합법화했고, 20세기에 약 70,000여 명의 장애여성이 그들의 동의 없이 임신중절을 당했다. 영국의 상원도 60년 후에 유사한 입법을 채택했다.

단, 영국의 상원은 정신지체 여성이 임신중절에 합의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약간의 모순은 ‘여성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면’ 여성의 합의가 없어도 의료 시술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신중절의 절차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법적역량’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호주의 보건부 vs JWB & SMB의 재판에서, 호주 고등법원은 13세의 정신지체 딸의 부모들이 딸의 임신중절을 결정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심의하는 것이었다. 고등법원은 법적역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가정법원이 임신중절을 결정하도록 했다. 고등법원의 견해는 가족이나 의료진이 행여 잘못된 결정을 할 위험 가능성이 법정의 결정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했다.

그럼으로, 가정법원이 그 임신 소녀의 최대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법정이라고 간주했다. 무슨 이야기 인가? 위의 판례들은 강제 임신 중절이 많은 나라에서 마치 차별행위가 아닌 문화적 특성의 하나로 정착함을 보여준다. 현실은 우생학, 생리 관리, 출산 예방 등의 허울 좋은 구실들로 여성의 강제 임신중절을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도전이다.

절대로 임신한 장애 여성에게 본인의 편리 혹은 정신적 및 신체적 건강이던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원치 않는 임신중절을 강요당할 수는 없다. 정부나 혹은 어느 단체를 대표해서 임신중절을 강요 할 수 없는데,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며 오직 해당 여성만이 독자적으로 결정 할 수 있다.

임신중절이라는 고통스럽고, 불편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을 강요받는다면, 장애 여성을 마치 태아와 비교해 덜 중요한 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임신을 하는 한 기구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여성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임신중절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임신중절은 어떤 경우에도 문명화되고 온정적인 인간사회에서 여성을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해야 하는 행위에 위배되며 여성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행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애매한 결론이 아니기를 바라며, 설사 사전 진단으로 장애의 원인이 있다 해도 최종 선택과 결정은 여성의 것이며, 결정이 어려운 장애여성의 경우는 권리협약 12조에 명기된 대로 임신중절을 강요받는 장애 여성이 보호자, 전문가의 권한으로 ‘대체 결정’을 하도록 강요받는가, 아니면 전문가, 보호자 등의 지원을 받아 스스로 선택하는 ‘지원결정’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가로 귀착된다. 기고자는 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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