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장애인등록제 실시와 1989년 장애인복지법 전면개정 이후, 장애범주는 점차 확대되어 왔습니다. 제도 초기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 정신지체(지적 장애) 5개 유형이었던 장애범주가 1차 장애범주 확대(2000년)와 2차 장애범주 확대(2003년)를 거치며 현행 15개 유형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장애정의와 장애범주는 한 사람의 여러 신체적․심리적․사회적 환경과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협소한 의료적 모델에 기준하고 있습니다. 2014년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1차 국가보고서에 대한 장애인권리위원회의 최종견해는 가장 처음 이와 같은 주문으로 시작합니다.

“위원회는「장애인복지법」이 의료적 장애모델을 언급하고 있음을 우려한다.

위원회는 대한민국이「장애인복지법」을 검토하고, 동 법이 협약에서 주장하는 장애에 대한 인권적 접근과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을 권고한다.”

한국 정부는 3차 장애범주 확대를 위하여 관련 연구를 지속하여 왔습니다만, 사실상 행정적․재정적 어려움을 핑계로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HIV감염인은 이런 반토막 장애정의와 장애범주의 사각지대에 놓인 대표적인 ‘장애인’입니다. 오래 전 HIV에 감염되면 체내의 면역체계가 장기간에 걸쳐 손상되고 다양한 기회질환에 노출되어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었습니다만, 현재 세대는 과학의 발전과 인권을 위한 다양한 노력으로 인해 항바이러스제의 규칙적인 복용 등 올바른 치료와 사회적 지원이 있다면 평범하게 생활해 나갈 수 있는 만성질환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연구들은 꾸준한 약물 복용을 통해 HIV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고 이 사실은 점차 각국의 정책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회입니다. 결핍된 면역은 해결할 수 있지만, 결핍된 인권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감염인이 발병 초기 심각한 정서적 혼란과 생활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발병 사실조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직장, 이웃은 물론 가족, 친척으로부터 모두 단절되어 고립된 섬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크고 작은 사고나 다른 질병으로 인해 병원을 찾더라도 HIV감염을 이유로 진료와 치료를 거부당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HIV감염은 ‘사회적 죽음’의 상태가 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상태’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체득해 왔기에 누구보다 잘 공감할 수 있습니다. 감염인을 죽이고 있는 것은 질병이 지닌 어떤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장벽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HIV감염인은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 ‘박탈된 존재’입니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장애인복지법 상 등록 장애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립재활원으로부터 입원 거부를 당한 HIV감염인의 차별을 장애인차별금지법 상의 차별로 판단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정부와 국회, 장애인단체 모두는 다시금 HIV감염인의 인권실태와 차별현실을 확인하고 법정 장애인으로서의 포함을 통해 실질적인 사회보장과 차별금지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HIV에 감염되었다는 이유로 가정, 교육, 고용, 건강을 비롯한 모든 일상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HIV감염인들의 권리가 하루 빨리 보장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HIV감염인, 장애인이기 이전에 ‘시민’이자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은 HIV감염인을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상 제19조(전파매개행위의 금지)가 핵심 내용인 이 법은 HIV감염인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법률이 아니라, HIV감염인으로부터 비감염인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법률로 보아야 합니다.

때문에 이 법률은 HIV감염인에 대한 공포와 낙인, 통제를 확산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며, HIV감염인에 대한 제대로 된 권리보장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다보니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이 발행한 세계 HIV/AIDS 통계에 의하면 세계 HIV감염 추세는 2010년 이후부터 2018년도 까지 총 16%가 감소하였고,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지만, 한국의 감염인은 2013년 이후로도 해마다 천명 이상의 신규 감염인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의 법률이 실효성이 없으며, 전파행위는 사실상 국가가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HIV감염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드러내고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사회, 말하는 순간 시민권이 박탈되는 환경이 바로 그 원인인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번 (사)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와의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단체 공동협력사업’을 통해 다시금 한국의 장애정의가 의료적 모델에서 사회적 모델로 조속히 변화되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하나, 정부와 국회는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상의 ‘장애(인)’정의를 보다 사회적이고 포괄적으로 개정하여 HIV감염인이 법정 장애로 인정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HIV감염인이 신체적․심리적․사회적으로 겪거나 느끼는 어려움과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별 특성에 맞는 실질적인 정책을 개발하고 확대해야 합니다.

다만, 장애 인정은 HIV감염인 당사자들의 의견수렴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이유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HIV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중단하고 권리보장을 하기 위한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의 즉각적인 전면개정이나 별도의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는 것을 늦추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둘, 정부와 국회는 현재 시․청각 및 신체적 장애인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현행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개정을 통해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은 물론, HIV감염인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하는 이들의 권리구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셋, 정부와 국회는 현재 의료적 기준에 근거한 협소한 장애측정과 판정, 장애인등록체계 자체를 재검토하여야 하며, 사회적 모델에 따른 인권적 접근이 실질적인 권리보장 효과를 불러올 수 있도록 장애인 정책 예산 전체를 OECD 평균 수준으로 확보하여야 합니다.

넷, 우리 사회의 장애인단체 및 시민사회는 HIV감염인이 법적 장애인으로 인정되어 각종 사회보장과 차별금지의 권리를 지닐 수 있도록 연대하며, 우리 내부의 HIV/AIDS에 대한 올바른 정보제공과 관점 정립으로 혐오와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 우리 사회의 장애인단체 및 HIV감염인 단체는 서로 간의 공감대를 확산하기 위해 같이 노력하고, 여러 소수자적 정체성으로 인해 중첩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없도록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에 협력해야 합니다.

2019년 12월 2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장애여성공감,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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