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 이성규(사회복지학) 교수. <에이블뉴스>

장애인관련 담론의 흐름

장애인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는지는 다른 인지객체들 즉, 여성, 노인, 아동 그리고 소수의 인간군을 어떠한 방향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한 때 여성들이 커피를 마시면 흡연을 하는 것은 마치 범죄행위를 하고 있는 것같이 여기기도 했다. 남성들이 물고 다니는 담배는 여성들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았다. 요즘은 여성흡연인구의 증가율이 남성의 그것을 상회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런던과 파리의 대로변 카페에 한가롭게 앉아 카푸치노를 음미하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여성들의 모습은 이제 한국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하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은 진행성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장애인을 보는 시각도 나라마다, 문화마다 그리고 시대마다 차이를 보여준다. 한 때 서구의 귀부인들이 애완용 동물과 함께 기르기도 했던 정신지체인들은 이제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장애인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정신장애인은 한 때 ‘신의 뜻’을 대신 전파하는 종교지도자같이 이해된 적도 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장애인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장애인만을 생체 해부한 것은 아니었다. 범법자와 문제청소년 등 그 시대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존재들은 대부분 그 대상이 되었다.

장애인도 인간임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집단주거시설 즉, 장애인생활시설을 건립하여 장기주거가 가능하게 조치한 때부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 전에는 생체 해부를 당하거나 나라살림에 백해무익하니 청소를 해야 하는 대상이다가 그 시대의 상황에서 볼 때 거대한 나랏돈을 들여 호텔(?)같이 좋은 시설에 모셨으니 얼마나 존귀한 존재로 변모하였는가. 요즈음은 그 시설이 분리와 차별의 산실로 인정받기도 한다. 역사는 이렇게 생물같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한 때 병원에서 그리고 복지관에서 만나는 전문가들은 장애인들의 생활을 광범위하게 아우르고 조정해주는 커다란 존재였다. 장애인 개인이 당한 비극을 치유하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도록 지원해주는 길잡이였다. 그 때는 장애인이 뭘 원하고 뭘 싫어하는지 파악조차 미약했는지 모른다. 최근에는 그 전문가들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인 ‘전문성’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장애인당사자의 욕구를 채워주는데 번지수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채워준다 해도 장애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름 하여 당사자주의다.

당사자주의의 상황 적합성

당사자주의는 그리하여 역시 흐르는 담론의 한 위치를 점한 상황적 개념이다. 편협하고 일방적이며 자기이익의 궤도를 돌고 있다고 규정된 전문가주의의 반대방향에서 장애인을 보고자 한다. 어쩌면 장애인을 다른 그 누가 보고 있고 해석하고 있다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 나를 결정할 터이니 모든 환경들은 그것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장애인을 국민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행정의 영역에서 장애성을 고려해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장애인이 빠져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전문가가 결정한 정책이나 프로그램들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애인들이 스스로 요구하고 참여하여 정책을 조형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주의가 확산되면서 정부관계자나 전문가 그리고 학자들은 장애인당사자의 욕구를 어떠한 방식으로 파악하고 어디까지를 욕구로 인정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당사자가 부정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나서는 불안에 떨기까지 한다. 설령 당사자들이 상식을 넘어서는 요구와 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외면하고 피하는 경향도 있다. 때로는 당사자들이 불법적인 요구를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하더라도 정부는 그에 대한 해결을 미룰 때도 있다. 전문가나 학자가 제시하는 장기 비전이 나라의 상황을 고려할 때 옳고 멀게는 장애인당사자들에게 유리한 것도 당장불편하면 당사자들의 저항으로 힘을 잃고 마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당사자주의와 전문가주의는 아직 갈등상황인 것 같다.

이제 이 갈등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대안을 마련해야할 담론의 장을 구성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같은 구도에서 서로의 입장을 한자리에서 주장한 들 해결의 실마리가 나올 것 같지 않다. 당사자그룹에서도 어디까지를 당사자주의자로 인정할지, 주의주장을 단일하게 할지 아니면 당사자 그 자체와 가족을 분리할지, 당사자라면 모든 그룹들을 무조건 옹호해야 할지 아니면 내부에서 가릴 것은 가려야 할지, 현재 당사자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공조하고 있는 자립생활 혹은 독립생활모델의 상황 적합성은 어느 정도이며 실현과정에서 또 다른 소외그룹이 당사자안에서는 나오지 않는지 등등 많은 이슈들을 이제 열린 마음으로 깊고 넓게 그리고 치열하게 정리할 때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전문성의 바탕이 당사자들의 살아있는 욕구인지 아니면 외국의 이론과 사례를 통해서 이질적으로 축적된 것인지, 당사자들에게 전문가의 존재자체가 부담이 되지는 않는지, 편안한 전문가의 길을 가기위해 당사자에게 기존의 관례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당사자의 세계와 경험을 사실그대로 인정하고 파악하기보다는 전문가의 식견으로 해석하고 결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등등을 역시 심각하게 논의해야만 할 때다. 그 후에 양 그룹에서 노출된 모든 것을 내놓고 서로를 점검해야할 것이다.

창립 세 돌을 맞고 있는 에이블뉴스는 그동안 장애인의 권리의식함양에 커다란 공헌을 해왔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단시일 안에 비장애영역까지 장애인 이슈를 발신하는 중요한 역할도 해왔다고 본다. 이제는 ‘열린 전문가주의’와 ‘어울림의 당사자주의’를 융합시킬 수 있는 공론과 담론의 장을 제공하면서 한층 성장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시대의 소명을 먼저 인지하는 신문과 매체가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다. 건승을 빈다.

*에이블뉴스는 12월 1일 창간 3주년을 맞아 ‘장애인당사자주의를 말한다’를 주제로 특별 기고를 받았습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와 장애인운동, 자립생활운동 등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여성장애인이 바라보는 장애인당사자주의는 어떤 것인지, 장애인부모가 바라보는 장애인당사자주의를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현재 총 8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첫번째 글은 서울시립대 이성규(사회복지학)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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