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K에게.

요즘은 매우 지루하고 갑갑한 일상으로 보냅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격렬한 투쟁의 현장도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지고 480만 장애인들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동지들의 모습 속에서도 나는 이제 이방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한 7-8년이 되었던 가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을 생활이라는 현실 속에서 악에 바쳐 살았었죠. 그리고 그 곳에서 삶의 실패와 좌절에 방황하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겨우 헤어나 온지 이제 2∼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장애판 이라는 또 다른 현실로 유입되어 어설프게 인지하고 있는 차별과 인권을 화두로 진정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를 다시금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무거운 책임과 중압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자학하기도 하고 현실에 갈등하면서 장애판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 왜 그리도 부끄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애인 당사자로써 장애인의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현실을 분석하고 실천적 대안을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 부족했음을 고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당사자 운동의 실천적 요구를 담에 내기에는 역부족 이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인권문제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의제로 그리고 사회적 공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무튼 나는 또 다시 장애판 이라는 아직은 나선 곳에 몸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K형을 이곳에서 재회 하였었죠. 그 재회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친구는 투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게 되었더군요. 나는 K형이 어찌할 수 없는 조건에서 투쟁의 한편에 있어야만 했을 때 그리고 공격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아무런 힘이 될 수 없었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안 했습니다.

한때는 이상을 향한 이념의 공감 속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었던 사람들이 상대를 향해 칼을 세워야 하는 상황을 맞아야 하는 현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나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다름으로 갈라서게 하였고 그럴 수밖에 없는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결코 쉽지는 않을 듯 합니다.

K형을 비롯한 우리는 과거에 모든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꺼이 하나 되어 행동할 수 있었고, 또 같이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힘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많이 불편해 졌습니다. 불편해 진 것은 K형과의 관계만은 아닙니다. 많은 선배와 후배들 모두가 조금은 어색함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 불화가 있은 것도 아니 였지만 마음자리가 편하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야 간단한 것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념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그리고 진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공유하는데 너무 게을렀던 탓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곳, 장애판에서 다시금 K형과 우리가 더 늦기 전에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그리고 우리가 아직도 이상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진정 장애해방은 어떠한 이념적 토대에 서 있어야 하고 실천의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과거에 우리들을 강하게 묶어 주었던 연대의 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삶의 방식과 이해의 방식은 달라도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행동의 통일성을 보장할 수 있었던 그 원천의 힘은 무엇 이였을까?

K형, 혹시 내가 이렇게 불쑥 물으면 우리의 재회가 어색하게 될 것 같지는 않을까 차마 공개석상에서는 묻지 못했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봅니다. 어차피 우리들이 함께 가야 할 길이고 고민해야 할 문제라면 K형의 그 현명함으로 나를 깨우쳐 주었음 합니다. 진보나 민중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일그러진 사회에서 억압의 굴레 속에 살아가야 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진보 방향과 희망의 메시지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장애인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현장 투쟁이 가열차게 전개 될 ‘05년 한해도 우리 앞에 여러 상황이 전개될 것이 예상 됩니다. 그리고 장애대중들의 분출하는 다양한 요구들 앞에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가 되어야 할지 지금부터 고민이 됩니다.

지금은 많은 동지들이 흩어져 갔고 남아 있다 하더라도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 아쉽습니다. 깃발은 부러졌으며 투지는 꺽여 버렸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방어와 저항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하여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까이에는 멈추지 않은 투쟁이 있고 건강한 의식의 소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때는 조금 위로가 됩니다. 물론 K형도 그러할 런지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K형도 잘 알다시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장애판은 가지각색의 생각과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고리로 묶여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장애인 문제와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가 존재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장애문제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접근 방식으로 인한 폐해가 너무 폭넓게 그리고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정당함을 주장하나 장애대중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고 있습니다. 장애판 처럼 우리 사회 어느 집단, 어느 계층, 어느 영역에 이렇듯 무질서하고 무개념적이며 막무가내가 있었습니까? 누군가 말하더군요. 급변하는 현실 상황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에는 한계적인 접근과 사고를 요구한다고. 평균적인 문제해결 방식으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나는 K형에게 제안합니다.

우리의 우정과 동지애를 복원하기 위하여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공간을 찾았으면 합니다. 건강하고 미래 지향적이며 480만 장애 대중의 요구를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동지들과 함께 우리가 예전에 공감했던 사회 진보에 대한 믿음과 사회구조악의 제거를 통한 진정한 장애해방의 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더욱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하자고…. 그 자리에 K형과 내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조만간 새로운 곳에서 둥지를 마련 할 생각입니다. 힘들고 갑갑했던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고 다른 한편으로 죄송할 따름입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잠시 머물러 있다 가게 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의 사무에 바쁠 K형에게 저의 느닷없는 제안이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내 건강하고 성취의 날들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05년 420투쟁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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