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김도현 정책국장. <에이블뉴스>

[릴레이 기고]자립생활지원 제도화를 논한다-⑦

활동보조인서비스(PAS)의 대상과자립생활(운동)의 주체 논쟁에 부쳐②

*이 글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김도현 정책국장님이 보내오신 두 번째 글입니다. 김도현 국장님은 이번 글에서 '18세 미만 미성년자의 활동보조인 서비스 지원대상 포함 여부’와 관련한 논란과 '부모운동이 자립생활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까지 짚어주셨습니다. 귀중한 원고를 보내주신 김도현 국장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잘못된 인권의 기준과 개념의 혼동, 그리고 외면될 이유 없는 객관적 필요

앞선 글에 이어 이제 연령 제한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이 문제는 정신지체 및 발달장애인의 포괄 여부와 기본적으로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현실에서는 서로 연동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미성년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들의 이기적인 주장이니 아니니 하는, 전혀 엉뚱한 논의로 번져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연령 제한의 문제가 정신지체 및 발달장애인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또 다시 ‘자기결정권’의 문제인 것이다. 18세 이상의 성인에게만 활동보조인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사회적으로 자기결정권이 승인되지 않은 집단이라는 근거를 내세운다. 아동과 청소년 인권의 필독서로 읽히는 책이 한권 있는데, 그 제목이《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이다. 맞다, 우리사회는 미성년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부정하며, 인권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 그들을 훈육과 보호의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학교에서의 체벌과 두발제한, 강제 야간자율학습으로 상징되는 각종 인권침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하고 또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현실이다. 장애인운동이 인권운동이라면, 적어도 잘못된 인권의 기준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된다.

미성년자가 사회적으로 자기결정권이 없다고 했을 때, 이는 민법상에서 미성년자가 (금치산자 및 한정치산자와 더불어) ‘행위무능력자’로 규정되는 것이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얼마간의 오류가 존재한다. 행위무능력자에게 제한되는 ‘일정한 법률효과를 의욕하고서 이루어지는 행위’인 법률행위는 주로 재산상의 행위와 부분적으로 신분상의 행위(혼인, 입양, 유언 등)에만 국한된다. '법률적'이라는 것과 '재산상 또는 신분상'이라는 두 가지 전제가 붙는다. 따라서 활동보조인서비스에서 이야기하는 일상생활 활동(Activities of Daily Living)의 극히 일부분만을 구성한다. 즉, 일상생활에서의 ‘자기결정’과 행위무능력자에게 제한되는 법률행위에서의 ‘행위능력’은 말도 다르고 실제로도 다른 개념인 것이다(이에 대해선 앞선 글에 대한 필명 ‘자립생활’님의 질문에서도 답변한바 있다). 식사, 옷 갈아입기, 세면, 용변, 이동 및 외출 등 대부분의 일상 활동은 이와 무관하며, 재산상의 행위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금전행위가 모두 법률적 재산행위로 소급되지는 않는다. 또한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근로계약에 있어서는 법정대리인이 대리할 수 없고 본인이 직접 해야 하며, 자신이 임금 청구권도 지닌다.

장애인의 활동보조인서비스를 논하면서 너무 나갔다고 생각한다면, 장애인에 한정된 구체적인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 권리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객관적인 필요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18세 미만의 미성년 중증장애인은 학교 갔다 돌아오면 친구도 안 만나고, 여가도 안 즐기고, 그 밖의 다양한 사회 활동도 하지 않고 집에만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아니 오히려 이러한 활동보조인이 없어서 학교조차 제대로 못 다녔던 것이 장애인들의 현실 아니었던가? 17살까지는 필요하지 않던 활동보조인이 18살이 되면 갑자기 필요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과 기준을 이유로 나이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 합리성을 지닐 수 있는가.

또한 미국의 경우에도 활동보조인서비스의 정의에는 연령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파멜라 도티, 쥬디스 캐스퍼, 시미 리박이 1996년에 함께 쓴 〈개인 케어의 소비자 주도형 모델들 : 메디케이드로부터의 교훈〉이라는 논문에서는,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연령의 장애인들에게 제공(provided to persons with disabilities of any age who require help with routine activities of daily life)”되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참고로 도티는 미국 연방정부의 보건복지부에서, 리박은 자립생활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 로버츠가 1983년에 설립한 세계장애문제연구소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더욱이 아래에서 얘기될 반시설(탈시설) 문제를 고민한다면, 18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활동보조인의 파견 문제는 매우 절실해 보이기까지 한다.

시설 해체를 주장하면서 정신지체 및 발달장애인과 미성년자를 배제할 수는 없다

자립생활운동은 탈시설(deinstitutionalization) 혹은 반시설(anti-institutionalization)운동과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이러한 정치적 입장 및 실천과 굳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약칭 한자협)나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한자연) 모두 적극적으로 이를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수용시설에 어떤 장애인이 얼마나 수용되어 있는지 확인을 좀 해보자. 이는 연령제한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지체 및 발달장애인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2005년도 장애인실태조사》와 보건복지부 재활지원팀의 ‘장애인복지 생활시설 수 및 입소현황-시도별 : 2000~2005’ 자료에 따르면 18세 미만의 재가장애인 비율은 전체 재가장애인의 3.9%에 불과한 반면, 2005년 말 현재 인가(認可) 생활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 중 18세 미만은 25.2%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전체 인구의 경우에는 20세 미만의 인구 비율이 25%정도 되는데, 장애인의 18세 미만 인구비율이 이렇게 낮은 건 후천적인 장애의 발생 원인이 89%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체 재가장애인 중 정신지체와 발달장애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6.4%인 반면, 생활시설에서는 무려 58.7%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18세 미만의 장애인과 정신지체 및 발달장애인 생활시설 수용률이 18세 이상 성인과 타 장애유형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세 미만과 정신지체 및 발달장애인을 제외하고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제공하자는 것은, 그리고 반시설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거나 자가당착적으로 보인다. 이들에게 활동보조인서비스를 포함하여 포괄적인 자립생활 지원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 한, 장애인 개인과 가족구성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된 책임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은, 이들의 탈시설을 실현시켜 내는 것은, 18세 이상 및 다른 장애유형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부모 운동은 자립생활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

이러한 정신지체 및 발달장애인과 미성년자의 자립생활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남는 쟁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현재의 장애인 부모운동이 자립생활운동의 주체로 설정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사실 장애인계가 오랫동안 토론을 벌여왔던, 소위 ‘장애인당사자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 6월 30일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한자협, 한자연이 보건복지부와 진행한 면담의 과정에서, 협의기구 내 부모단체의 참여 여부를 놓고 보였던 이견은 당사자주의와 관련해 존재하는 입장의 차이를 반영한다.

우선 이러한 장애인당사자주의에 대해 준거가 될 만한 내용을 살펴보자. 한국에서 자립생활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장애인당사자주의 기치를 걸고 활동해왔던 한국DPI의 김대성 이사(현 한국DPI 사무처장)는 《진보평론》제18호에 기고한 〈장애인당사자주의 운동의 참여와 연대정신〉이라는 글에서, “당사자와 당사자주의는 다르다. 당사자라고 해서 당사자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당사자단체라 해서 당사자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없다. 당사자는 아니지만 당사자주의를 지지하고 당사자운동에 앞장설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이는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여성주의자는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의 주체로서 계급 역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맞닿아 있는 보편타당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대성 씨는 척수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의 경험이 다름을, 그들이 부딪치는 사회적 장벽의 내용도 다름을 지적하며, 당사자주의란 바로 주체가 겪는 삶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함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유사(類似) 당사자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경우의 하나로 장애인 내에서도 소외되거나 약자가 되는 장애유형을 만들어 내는 ‘편향된 당사자주의’를 들고 있다.

다음으로 대구대학교의 조한진 교수는 2006년 3월 1일에 있었던 ‘장애민중운동의 역사, 그리고 방향성과 과제’ 토론회에서 부모와 관련한 장애인당사자주의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 요지는 “당사자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인 동시에 고정점을 지니고 있다. ‘정부나 대 사회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부모도 당연히 당사자가 될 수 있다. 한편 ‘장애인의 부모와 그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장애인이 당사자이다”라는 것이다.

비장애인인 필자는 개인적으로 장애인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내부적 연대자임을 공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 피력해왔다. 장애인 운동에 많은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 만큼 이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정치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권력과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객관적 입장, 현재 장애인계의 상황, 그리고 장애인 부모 운동의 특징과 흐름을 고려한다면, 장애인 부모운동도 당연히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우선 현재의 부모운동은 장애인 당사자의 교육권을 위해 거리에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세력이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당사자주의가 혁파하고자 했던 전문가주의와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 그리고 장애인의 부모는 일반적인 비장애인과 동일시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닌다. 현재의 부모 운동은 정신지체와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장애유형의 경험을 ‘현재’, ‘누가’, ‘사회적으로’ 표출할 것인가의 문제를 우리는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정신지체와 발달장애인이 겪는 일상과 차별을 다른 유형의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 중 누가 더 깊이 있게 (간접) 경험하는지를 우리는 물을 수 있어야 하고, 답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장애인 운동 내에서 정신지체와 발달장애인의 문제가 겪어 왔던 소외를 생각한다면, 기계적인 당사자주의를 적용시켜 부모운동이 자립생활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말해선 안 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부모운동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발전할 것이다. 이러한 부모운동이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립생활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 자립생활운동에 있어서도 전체 장애인운동에 있어서도 발전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혹자는 가족 내에서 부모도 장애인을 억압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도 노동자를 억압하는 구사대(救社隊)로 등장할 수 있고, 장애인 당사자도 장애인을 억압하는 주체로 등장할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아 보인다. 김대성 씨가 자신의 글에서 지적한 “당사자란 이유만으로 정치권이나 정책결정과정에 편입되어 당사자에 반하는 내용을 만들고 당사자 참여를 배제시키는 사람”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장애인단체가 장애인 노점상을 폭력 철거하는 현장에 나서 장애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극적인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 장애인을 억압한 주체에게는 그가 가족이든 장애인이든 명백한 도덕적․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이러한 모순의 본질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제기되고 해결되어져야 한다.

당사자와 당사자 ‘주의’가 다르듯이, 자립생활의 주체와 자립생활 ‘운동’의 주체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장애인 당사자와 자립생활의 주체는 생물학적 의미의 장애인이겠지만, 당사자주의와 자립생활운동의 주체는 현실의 실천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지 결코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또한 생물학적 의미의 장애인을 넘어선다.

두 번에 걸쳐 다소 길게 했던 얘기, 이제 짧게 정리해보자. 우리는 원칙과 임의적인 기준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자립생활운동에 있어 전장애영역의 포괄이라는 원칙을 유보시키고자 한다면, 이는 결국 임의적인 기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객관적인 필요와 현실을 외면한 채, 18세 이상이라는 임의적인 기준을 우리가 원칙으로 만들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장애인당사자주의가 제기되었던 맥락을 살피지 않고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시켜 소중한 당사자주의의 정당성을 훼손시키지 말자.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보편적인 권리로서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쟁취해 나가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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