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은 소멸을 전제로 만들어진 곳이다. 시설이 당연한 것인 양 왜곡하지 말자. ⓒ구근호

왜 반시설인가

시설을 바라보고 고민하는 것은 그곳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여러 가지 시각들이 존재한다. 시설옹호자에서부터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람, 점진적 탈시설을 얘기하는 사람, 그리고 시설의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어지고 있다. 옹호자들은 여전히 시설이 부족하다며 증설을 시도하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시설민주화나 시설의 소형화를 외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처절히 폐쇄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첨예한 활동들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런 활동들의 결과로 인하여 이제 어느 정도 시설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커다란 방향은 인식되어지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시설의 필요성이나 불가피성을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시설이 갖는 태생적 한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경찰, 의사, 교도소, 군인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궁극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이 우리 모두가 바라고 추구하는 세상이라는 거다. 시설도 마찬가지다. 시설의 태생적 역할은 시설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역할이 필요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금 당장 불가피하다고 해서, 어렵다고 해서 본연의 궁극적 목적까지 망각하진 말아야겠다. 망각을 넘어 호도하진 말자. 마치 시설이 좋은 것인 양, 당연한 것인 양 그렇게 왜곡하진 말자는 것이다.

시설의 근본적 존재 가치는 자신을 소멸시키고자하는 노력이다. 이 명제를 가지고 논할 때에만 시설의 존재이유와 가치가 명확해 지는 것이다. 탈시설도, 시설민주화도, 시설의 소형화도 시설의 궁극적 목적이나 가치의 확대는 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존재성 상실이라는 시설의 목적을 이루려는 목표나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탈시설도, 시설민주화도 아닌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반시설인 것이다.

왜 자립생활인가

위와 같은 시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시설의 필요성과 불가피성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게 중요할 것이다. 자립생활이 그 본연의 이념적 중요성을 접어두고라도 개념만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고 역할을 부여 받을 수 없어 자연히 도태되고 격리될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 삶의 그 악순환을 대체적 방안이 아닌 근본적 방안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 방향성은 물론이고 방법론적 대안까지 자립생활은 이야기한다. 어렴풋한 개념만으로도 시설로 대변되는 현재의 장애인복지의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는 자립생활운동은 실상 그 이상의 것을 갖고 있다. 그 안엔 당사자주의라는 큰 이념의 뿌리가 있으며 소비자주의와 인권, 그리고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중심의 문화가 있다.

사람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고 그 발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비인간적이고 반인류적 문화가 아닌 사회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 사람을 위해 사회가 맞춰져야한다는 생각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의 중심에 기준점 내지 시금석으로 장애인이 있다. 장애인이 인간적 삶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언제든지 그 누구에게도 인간적 삶을 보장할 수 없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적 삶의 파수꾼으로써 장애인은 그 어떤 계층보다 이 사회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장애인뿐이 아닌 모두를 위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운동성을 전제로 한 자립생활 이념은 구체적 서비스와 사업적 마인드를 겸비함으로써 더욱 피부에 와 닿는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장애인이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아닌 어울림으로 나아가는데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동료상담, 자립생활프로그램, 활동보조, 정보제공, 등은 자립생활에 필요한 손발이 되어 머리격인 운동성과 이념을 실현시켜 나아가고 있다. 지금껏 양립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던 운동성과 복지서비스를 함께 추구함으로써 어느 때보다 그 파급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의 인간적 삶, 그리고 모두의 인간적 삶을 위한 실천적이고 방법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자립생활운동은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일 수 있다. 자립생활운동은 궁극적으로 운동을 넘어 문화를 구현하는 것이다. 사람이 중심인 문화 그것, 그래서 자립생활이다.

관계맺음과 전망, 비전에 관하여

시설과 자립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앞에서 말한 시설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자립생활이 꼭 필요하며 자립생활 또한 시설은 자립생활의 이념을 실현시키는데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로의 것을 이루거나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껏 대립과 반목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반아들일 면도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발전적 긴장감 이상의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결국 추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각성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살피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궁극적 목적이다. 시설의 존재 이유, 자립생활의 방향성, 이것은 인정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를 명확히 한다면 궁극적 목적을 향해 시설과 자립생활운동도 반목을 넘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명문으로도 시설의 장애인만큼, 그들의 삶만큼 중요하진 않으니 말이다.

어느 시설 장애인의 고민

얼마 전 갑자기 전에 알고 지내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설에 지금까지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 후배였는데 시설에서 나오고 싶다며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난 당연히 도와줄 것을 약속하고 자세한 상황 파악과 본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기 위해 직접 만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여느 시설장애인이 그렇듯 본인이 시설 밖으로 나오기는 힘든 상황이었고 하여 내가 날을 잡고 시설로 찾아가 만나기로 하였다. 항상 시설에 찾아가면 느끼는 것이지만 왜 그리 시설은 산 좋고 물 맑은 곳, 인적없는 곳에 있는 것인지????

경기도에 있는 00시(市)라 하여 그래도 1시간 반이면 넉넉할 줄 알았던 나의 예상은 여실히 깨어졌다. 2시간 반이나 걸려 접근한 그곳은 가까워질수록 길은 경운기나 다닐 법한 좁은 시골길이고 사람은커녕 건물 한 채조차 보기 힘든 논밭 길, 허허벌판이었다. 문득 빠삐용이 생각나는 건 왜인지??

전동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와도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까지는 전동휠체어 배터리가 부족하여서라도 못가겠다는 괜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여 어렵게 만난 그 후배는 보자마자 답답하다고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길 원했다. 그래서 다시 30분을 차로 오던 길을 달려 음식점에서 우리는 드디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는 별게 없었다. 시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오려고 하면 흔히 겪는 그런 것들이었다. 시설 책임자는 중증장애인이 혼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반대하고, 집을 얻으려니 돈이 부족하고, 자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등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래도 이 후배의 경우는 모아둔 돈이 꽤 있는 편이어서 본인만 확실히 결심하면 금방 자립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며 나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그런 외형적 문제들이 아니었다. 그 후배가 최우선적으로 바라는 것은 조용히 좋게 나오고 싶다는 것이다. 시설과 큰소리 내거나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이유에 대해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시설과의 싸움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스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의식이었다. 자신을 돌봐주고 키워준 시설을 배신하면 안 된다는 죄의식, 그것이 자신의 자유와 인권을 담보로 한 것임을 엄연히 알면서도 말이다.

시설이 답답해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말이 밖에 나가자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시설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자신의 삶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돌아오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이 후배를 자립시키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에서부터 시설은 역시 처음부터 없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까지….

시설이 참으로 싫고 두려운 것은 그곳이 인권의 사각지대이고 비리의 온상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이 길들려진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들을 당연한 것이 아니게 만들고, 분노해야할 곳에서의 분노조차도 변질되게 만드는 진정으로 무기력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진정 두렵다.

시설은 필요 없어지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곳이다. 다시 한 번 이것을 명확히 하자. 이상한 이론과 괘변으로 이를 왜곡하지 말자. 지금은 여건상 아니더라도 이를 추구해야 됨은 제발 제발 잊지 말자. 그리고 그 대칭점에 자립생활운동이 있음도 잊지 말자.

*이 기고문은 DPI 매거진 2009년 2월호에 실린 것으로 에이블뉴스의 요청을 받아 새날동대문장애인자립생활센터 구근호 소장이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17년간 재가 장애인으로서 수감생활(?)도 해봤고 시설에 입소도 해봤으며 검정고시로 초중고를 패스하고 방통대를 졸업. 장애인올림픽에서는 금메달까지 3개를 땄던 나. 하지만 세상은 그런 나를 그저 장애인으로만 바라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알게 된 자립생활! 장애라는 이유로 더 이상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 분리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꿈꾸는 곳. 장애인이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며 살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나는 지금 이곳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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