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에 따르면 2018년 대한민국 정부의 GDP대비 사회복지예산 비율은 2018년 기준 11.1%를 기록했다. 이는 칠레와 0.2% 차이이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멕시코의 두 배가 조금 되지 않는다. OECD 평균은 20.2%라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우리나라보다 사회복지예산을 투입하는 비중이 적은 OECD 회원국은 단 두 개, 칠레와 멕시코 뿐이다. 구매력으로는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3만달러를 돌파했다는 뉴스를 기쁘게 전달하던 모습과는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 도시에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경찰들이 돌아다니는 나라 못지 않게 복지에 신경을 안 쓰고 있다. 멕시코는 이해할 수 있다. 멕시코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간간히 우리들에게 전해져온다. 그리고 그런 심각성에 가감이 없음을 전세계가 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정부지출싵태가 멕시코 못지않게 나쁜 것도 이해가 된다. 식민지배의 역사가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고, 식민 모국이 그래왔듯, 사회주의 물결이 일었다가 국제관계 상 이해관게에 휘둘려 바나나공화국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베네수엘라도 전형적인 케이스다. 유전을 무기로 휘두르려던 우고 차베스의 경제적 외교정책으로 인해 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말았다. 경제정책이 실패하면 긴축은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기도 하다.

한국이 정부의 실패를 시인하는 국가들처럼 지출을 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아무도 이 답을 할 수 없었기에,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듣기 지겨울 정도로 국가의 사회보장 강화를 항상 강조했다. 그리고 돌아온 결과가 사회복지 지출비율은 OECD 평균의 뒤에서 3등, 공적연금(기초연금 및 장애인 연금)지출 비율은 뒤에서 4등, 장애인 복지예산지출 비율 뒤에서 3등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 정부에게 동메달 두 개를 달아주자. 이 메달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누가 더 인색한지 경쟁하면서 얻은 소기의 결과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세입 규모를 늘려야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 대신에 국가 주도로 판매한 마약인 담배에 대한 세금을 늘리는 졸렬한 꼼수도 가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자뺏기싸움이나 다를 바 없는 장애인 복지예산의 사용 실태를 보고도 정부지출이 늘어나면, 베네수엘라 꼴이 날 거라는 홍준표 국회의원께도 상을 하나 드리자. “베네수엘라급 복지를 유지시켜준 위인상”으로.

정부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항상 ‘좌파적’이라는 말이 따라온다. 대개 그런 말을 하는 이들들은 중국, 북한, 러시아 등 권위주의적이고 집합주의(collectivism)적인 나라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눈을 돌려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나라는 그들이 ‘싫어하는’ 나라들이다.

북한이 1990년대 식량난에 어떻게 대처했나? ‘좌파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공적부조의 지출이 아니라, 그저 굶어 죽는 순간에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편에 맞지도 않은 청년축전을 여는 허장성세와 국가의 역할을 방기 한 채 주변에 죽어가는 이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산 사람에게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선전을 하는 얕은 수의 압제만을 써왔을 뿐이다. 대한민국정부가 현재 장애인 복지정책과 그 예산을 다루는 모습은 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불안했던 현대사를 무시하고 무턱대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신생 독립국이었으며, 남북 분단과 전쟁을 겪은 나라였다. 1950년대에는 우리나라는 문자 그대로 최빈국이었으며, 박정희의 스탈린식 정책과 압제를 통해 급속한 경제개발을 대통령의 ‘영도’아래 해냈고, 박정희 신화는 가족과 가장의 관계로 재생산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그저 더 많은 부를 쥐기 위한,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행태를 1990년대까지 이어갔고,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들은 눈덩이로 굴러와 결국 끔찍한 사회문제로 돌아왔으며, 박정희 신화는 막을 내렸다. 박정희 신화의 재림을 바란 사람들의 염원이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모였지만, 그 염원이 헛됨이 증명되기까지 4년도 걸리지 않았다.

헌데, 박정희 신화가 깨진 지금에서 ‘‘약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릴 수 없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유산에서 찾기 시작했다. 유산은 곧 사회에서 군림하기 위한 자본이 되었으며,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들도 사회의 중역을 맡게 되며 자신의 능력을 물려주는 식으로 이 혼란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본을 활용하여 완벽하게 사회적 성공을 보장시키는 그들의 행태는 다시 시민들을 좌절시켰다.

그 결과가 시민들을 탐욕적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전생의 영혼까지 끌어모아'집을 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그들이 절박한 탐욕을 내비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고의 노력으로 집(자본)을 사지 않으면, 아무도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양한 연기금들을 통해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적절한 주거환경이 거금을 들이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아무도 그 탐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정부는 오랫동안 쌓인 장애인복지문제를 위해 더 예산을 쓰는 대신, '부동산 대책' 등 시민들의 마음을 달랠 '공갈 젖꼭지'를 물려주며 정말 중요한 문제들을 얼버무렸다.

취약계층에 더 지원을 하겠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진정하게 취약계층을 지원하고자 했다면,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문제 해결과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예산이 다른 복지예산을 쥐어 짬으로서 나오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잉여예산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다. 사회복지예산이 경제규모에 비해 형편없이 적게 책정되는 상황에서는 그 무엇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느냐, '모두'에게 주느냐 고민하기 전에 필요한 자원을 충당하라는 것이다.

p.s. 국감장 속 박능후 장관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대한민국의 보건복지부 장관답게 일 할 뿐이다. 그는 왜 거리에 장애인들이 나오지 않는지, 지금도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싸우는지 종신토록 모를 것이다.

*이 글은 정신질환 당사자가 보내온 기고문으로 '잘린 무지개'란 필명으로 게재 합니다. '잘린 무지개'의 의미는 무지개처럼 다양한 정신질환의 스펙트럼을 편의에 따라 재단하는 사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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