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는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이 열린다. 그리고 패럴림픽도 함께 열린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두 축제는 시차를 두고 따로 열린다.그렇다면 두 개의 분리된 올림픽을 하나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신체적 차이를 근거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적 고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건각의 스프린터와 휠체어가 한 트랙에서 달린다거나 보이지 않는 사람과 두 눈 멀쩡한 사람이 권투 글러브 맞대고 있는 극단적 상상들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으로 동등하기 때문에 같은 올림픽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인가?체격이 월등하게 큰 선수와 평균이하로 작은 선수는 또 어떻게 같은 종목에 출전할 수 있는 것인가?

성별을 나누고 체급을 나누는 아주 단순하고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는 이미 신체적 차이가 있는 여러 다름이 하나의 올림픽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한다. 때로는 그들이 함께 경기하는 혼성종목이나 팀플레이들도 존재한다.

동계올림픽의 '팀추월'이라는 경기는 세 명의 팀원 중 가장 늦게 들어오는 선수를 기준으로 승부가 갈리는 협동종목이기도 하다. 장애인 부문을 만들거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팀을 이루는 종목을 신설한다면 그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장이 극단적 이상주의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난 그에게 올림픽의 모터가 무엇인지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세계인이 하나 되는 평화의 축제’ 그런데 어디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인가? 혹시 장애인은 세계인에 들어가지 않는 외계인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경쟁과 승부가 아닌 도전과 협력이라고 방송국의 중계진들도 IOC도 반복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올림픽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영화로 패럴림픽은 눈물 닦을 손수건을 준비해야 하는 감동 다큐멘터리로 장르를 구별하여 상영되고 있다.

만약 아직도 함께 하는 올림픽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에게 최적화 된 도시를 따로 만들어서 그들끼리 살게 하는 것이 장애인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가? 우리는 올림픽이라는 잘 짜인 각본을 반복적으로 시청하면서 장애인에게는 뭔가 다른 배려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세뇌 당하고 있다. 그리고는 진실 아닌 그것을 굳게 믿고 아는 대로 도움 아닌 폭력을 행사한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삼겹살집에 자주 가는 편인데 시각장애 때문에 직접 고기를 구울 수 없는 나를 위해 동료들은 직접 구운 고기를 나에게 나눠 주고는 한다. 후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늘같은 선배도 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

받아먹는 나의 입장도 매번 편한 것은 아니어서 난 고기가 아무리 먹고 싶어도 "구워졌나요? 다 구워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라고 묻는 대신에 슬쩍 샐러드 접시에 젓가락을 가져간다.

일반적으로 그 위에 잘 익은 고기를 얹어주는 것으로 암묵적 합의가 되어있는 터라 적당한 시간이 되었을 때 그렇게 행동하지만 생각보다 고기는 빨리 익지 않는다. 난 원래부터 양파를 먹고 싶었다는 듯이 한 젓가락 집어서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접시로 젓가락을 가져가고 아직 익지 않은 고기 덕분에 다시 양파를 한 젓가락 집어서 맛있게 먹는다.

물론 서로가 민망하지 않도록 난 최대한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한 과정이 몇 번쯤 반복되고 나면 내 접시의 양파는 깨끗이 비워지고 난 그때야 이제는 고기만 잘 집어서 먹을 수 있겠구나 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그런데 세상은 언제나 맘과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어느 틈엔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동료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내 접시의 양파는 리필이라는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다.

때때로 고기 몇 점을 먹기는 하지만 그러한 과정들을 되풀이 하고 나면 난 회식이 끝났을 때 쯤에는 삼겹살집에 다녀온 것인지 양파집에 다녀온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 물론 나의 처지와는 아무 관련성 없이 열심히 나의 식사를 도와준 동료는 보고 느끼고 알고 있는 대로 보이지 않는 장애인을 도왔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끼면서 돌아갔을 것이다.

단지 그가 믿고 있는 앎이라는 것이 나의 실제 처지와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지팡이 집고 다니는 나를 만나게 되면 아직도 천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고 인생의 희망과 주님의 보살핌 등을 이야기 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한 그것은 선행이고 지행일치일 것이다.

그러나 유투브로 정보를 얻고 sns로 소통하고 ocr 기술로 문자를 해독하는 나의 실제와는 고민의 결을 같이 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난 그들에게 받을 것 보다 줄 것이 많은 가진 자 일수도 있다.

다만 그들은 올림픽과 패럴림픽 같은 무언가를 보고 장애를 배웠고 배운 대로 실천했지만 그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을 뿐이다.

*이 글은 RI Korea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장인 한빛맹학교 교사 안승준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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