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식 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에이블뉴스DB

아마도 초기의, 대략 1970년대의 유럽에서 시작된 장애운동은 장애인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의 처우와 장애의 지나친 의료화에 대한 항거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접근성의 문제가 극명하게 규명되었고, 기존의 장애의 개념을 초월케 하는 장애의 사회모델이 대두되었다.

1983년 영국의 장애 학자 마이클 올리버에 의하면, ‘의료 모델은 장애인의 손상된 부분을 치료하는 것이고, 사회모델은 장애인을 장애로 만드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법 연륜이 깊어진 외국의 장애 학의 문헌에서는 장애운동이 전반 적으로 긍정적이었다는 관점이 피력되고 있다. 정치적 변화를 유도해 낸 집단적 능력에서 그리고 장애인당사자들의 참여의 체험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장애계 전반에서 폭넓고 포괄적인 장애 지역사회가 형성되어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인 장애인의 정체성이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장애의 사회적 모델과 아울러 남미의 신부 푸리에르 (Freire)가 개념화했던 의식화운동을 통해 장애운동에 자아의식을 강화시켰다고도 한다.

장애운동의 기원은 대체로 1970년대와 80년대 주로 영국을 필두로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후에 「유엔장애권리협약」의 채택에도 크게 공헌한바 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다소 후발이기는 하나 유사한 형태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국의 DPI, IL 운동과 Asia Pacific Disability From (APDF), DRF, RI Korea 등은 분명히 장애운동의 국제적 흐름에 동참한 바 있다.

장애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사회운동을 처음 시작한 것은 청각장애인들의 세계적인 사회운동이다. 그들은 ‘손상/장애’의 개념을 거부했고 자신들을 소수 인종과 비교하여 ‘언어 소수자’라고 규정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갤러뎃 Gaullaudet 대학에 1988년에 청각장애가 없는 총장이 임명되었다가 취소된 적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장애문화권(Disability Culture)라는 개념으로 장애운동의 정체성을 정리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소수인종/민족의 정체성과 맥을 함께 하며 공동언와, 공유하는 역사적 배경, 응집력 있는 공동체와 정치적 연대의식을 그 특징으로 제시한다.

장애운동을 통한 장애인의 정체성이 장애인들로 하여금 손상/장애에 대하여, 그리고 한 사회 속의 위치에 대하여 생각해볼 실마리는 분명히 제시하는 듯싶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문제는 있는 것 같다. 과연 한국의 장애운동에 공동체 의식, 정치적 연대와 결속은 분명히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긍정적 요소보다는 오히려 분열적이고, 장애운동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는 서구 장애학계의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 이익을 둘러싼 장애 단체들 간의 갈등과 경쟁의 경험이 먼저 떠오른다.

운동권 장애단체와 전통적인 주류의 장애단체를 구분, 차별화 하는 경향도 있다. 단, 한국의 장애운동 만이 딱히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도 ‘이동권 연대’ 등 눈에 띠는 장애운동이 있고, 4월의 장애인의 날에는 장애단체들이 대거 운집하지만, 어쩐지 한국의 장애운동은 소수만의 프로테스트이었고 운동이었던 것 같다. 때로는 어떤 장애단체의 데모가 다른 단체에 의해 지원은커녕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장애운동은 반드시 시위, 데모만을 할 수는 없으며, ‘장애인 먼저’ 등과 같이 여러 형태로 장애운동이 전개되고 표현 될 수 있음을 밝힌다. 때로는 필자에게도 극렬한 시위에 대한 지원과 함께 역 효과의 가능성 때문에 다소 우려스러웠던 경우도 없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물론 시위와 운동에 동참하지 않음이 반드시 장애운동의 기본정신을 거부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해방운동, 예를 들면 여권운동, 동성애자 운동 등도 그 동원력에 있어서 상당수의 지역사회 호응을 받지 못한다.

장애단체 중에도 현상유지, 기득권중심의 보수적 성격이 강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어떤 이념이나 가치를 지향하는 진보성을 띤 단체도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장애 단체 간, 장애 유형별에도 불평등 혹은 빈부의 차가 있는데, 뿌리 깊은 장애단체는 보수성이 강한 것 같다. 제도권에 저항하는 운동권에 합류되면 상실할 것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러한 빈부의 차, 장애유형별 불평등은 정치권, 관련 부처나 결정권자의 접근성, 로비 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장애인 중에도 이동과 접근성의 문제, 제대로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지적 장애, 오티즘 등 장애의 성향 상, 이념적 차이, 혹은 재정적 제약으로 운동에 참석 못 할 수도 있다.

장애운동은 반드시 ‘비 장애 (그들) 과 장애 (우리)’라는 일방통행 적이거나 외부 지향적인 것만은 아니다. 반드시 장애 계 내부에도 장애 운동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문제가 분명히 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장애운동의 정체성은 폐쇄나 편 가르기가 아닌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는 열린 운동이어야 한다.

반면에, 상당수의 장애인들은 자신들을 ‘장애인’의 범주에 넣기를 거부한다. 특히 젊은 층에선 더 많은 수가 장애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연구에 나타난다.

실제로 외국의 어떤 연구에는 ‘장애의 사회모델’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한국의 장애학계에서도 연구를 해 보았으면 한다.

“장애단체들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유엔장애권리협약」에 대한 직원 교육을 철저히 하는가?” “과연 장애인 중에 「유엔장애권리협약」에 대한 이해가 깊은지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지?” “장애운동에 적극 참여 한 경험이 얼마나 있는지? 아니라면 그 이유?” ‘장애운동을 지지하는 장애인은 얼마나 되며, 지지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아니면 ‘한국장애운동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등등의 연구주제 말이다. 웃어넘기자는 말이 아니고 ‘한국의 정치가, 사회 지도자들의 지속되는 장애비하 발언의 근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에 대한 법적, 전략적 대책이 장애 계를 중심으로 시도되어야 하지 않는가? 선거철이 임박해 오는데, 정당에 유혹당하거나 사욕으로 인해 정치에 입문하지 말고 진정으로 장애 계를 대표하는 대표성 있는 인사가 국회에 진출하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국 장애운동의 정체성‘을 생각함에 있어서 ’한국의 장애운동은 얼마나 한국의 장애 계를 대표하는가? ‘ 하는 대표성의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장애운동‘은 소수의 혹은 특별한 장애집단에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좀 재미있는 현상은 장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소위 선진국의 경우 장애인의 상당수가 50세 이상이며, 소위 ’운동‘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대체로 ’운동‘은 젊은 층이 이끌어가는 경향이다.

유사한 문제로 발달장애, 학습 장애인들은 언어의 장벽으로 대체로 운동권에서 소외되거나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장애운동 초기에는 장애의 사회모델이 지적장애인들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장애의 인권모델로 올라서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장애운동이 소수의 단체에 의해 독점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반드시 바람직한 일은 아닐 성 싶다.

아울러 장애운동에서의 장애유형별 구별이나 차별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이다. 장애의 다양성에 대하여 집요하게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동과 장애여성이 주류 장애 운동에서 배제되거나 무시, 소외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소수민족에 대한 무시나 차별과 유사하다.

필자는 유엔위원으로 활동할 때 기회가 주어지면 ‘장애아동과 장애 청소년’의 문제로 논의를 환기시켰었다. 대개의 권리논의는 성인 남성으로 치우치는 경향이었고, ‘장애아동과 장애 청소년’ ‘여성 장애인들은 잊히고(forgotten) 있었다.

여성장애단체의 주류 운동권에 대한 비난은 경청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기회 있을 때 마다 지적하지만, 장애계는 좀 더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면, 2014년 ’도가니‘ 사태, 혹은 ’염전 노예‘사건이 났을 때 얼마나 많은 사회복지사들이, 장애전문가들이 큰 소리로 성토하고 분노해 했는가? 그 많은 사회복지학과나 장애인복지관들 중 어느 하나가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와 시위한 적이 있었던 건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정치권의 장애비하 정치가들을 솜 방망 같은 결정만하는 국가 위원회에 제소만 요청하는가? 필자가 도서출판과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으로 전국을 돌며 ’사회복지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당시 초기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사회복지사의 인권은 누가 수호하는가? ‘하며 서울 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사들이 교대로 시위하던 오래 전의 일이 생각이 난다. 그런데 '도가니', '염전 노예' 사태 때에는 왜 그렇게들 침묵했던가?

구태여 운동권과 정체성이나 철학을 공유하지 않는다 해도 분명히 분노하고 성토할 사안과 쟁점에 대해선 일체감을 가지고 모두 일어나야 한다. 간혹 「한국의 장애인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는 있는데, 왜 보다 더 포괄적이며 심도 있는 국제법인 「유엔장애권리협약」의 철학과 원칙을 핵심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장애운동을 결집하고 확산시키지 못하는가?

무엇을 위한 장애 운동인가? 역사적으로 주어진 기회를 장애 계가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장애운동의 구체적인 비전, 목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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