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퇴근길에 정신없이 활동지원사와 함께 뛰어 가서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퇴근하는 시간이어서 마을버스는 만원이었고 저와 활동지원사도 더 이상 뒤로 가지 못하고 버스 앞의 교통카드 단말기 주변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사람들에게 밀려서 미처 버스요금을 결제하지 못하고 뒤로 가게 되었나 봅니다. 그 분은 저희 활동지원사에게 자신의 카드를 주시면서 교통카드 단말기에 교통요금 결제를 부탁하셨습니다. 저희 활동지원사는 흔쾌히 그 분의 카드를 건네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간 놀래셨다고 합니다. 건네받은 신용카드가 보통 카드와는 달리 많이 쭈그러져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난로에 가까이 두어서 열로 인해 카드가 구불구불 쭈그러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이 설명은 제가 직접 카드를 만져 본 것은 아니지만 저의 활동지원사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신 것을 이미지로 카드의 그림을 그려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날 그 쭈그러진 카드를 건넨 그 어떤 분과 이 카드가 제 심장을 무척 뛰게 하고 감동을 주었습니다. 보통은 카드가 많이 쭈그러지면 카드사에 연락하여 새 카드를 발급 받을 텐데 이 분은 그 쭈그러진 카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쭈그러진 카드는 다소 모양은 변형되었지만 여전히 그 카드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결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20대에 실명하여 인생에서 무척 인정하기 힘든 장애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쭈그러진 카드가 마치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명으로 인해 눈이 보이지 않는 저의 모습이 카드의 쭈그러짐과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 카드는 비록 쭈그러졌지만 마을버스 교통카드 단말기에 접촉하면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삑"하는 소리와 함께 교통요금을 결제하는 것입니다. 저의 삶도 한번 이 카드에 투영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중도에 실명하여 상상도 하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삶으로 패배와 절망 가운데 살아 갈 것인가?

실명이라는 장애의 경험을 저의 삶에서 기꺼이 경험하는 용기를 내어 선물로 삼을 것인가? 저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비록 실질적인 사물을 보는 시력은 잃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장애라는 경험을 통해 장애를 느끼고 이해하고 무엇보다도 장애도 이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배워가면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실명이라는 장애를 기꺼이 경험할 수 있는 용기를 내기까지 저 혼자의 마음의 결단과 노력으로 걸어 온 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 공동체, 친구들을 비롯하여 사회 속에서 수 없이 스쳐갔던 함께하는 손길들, 그리고 국가가 있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쭈그러진 카드가 교통카드 단말기에 접촉할 때에 "삑"하고 내는 그 소리가 바로 제가 아니 우리 장애인 동료들, 아니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연약함 즉, 취약성이 있더라도 혼자가 아닌 함께 더불어 관계하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용기가 내는 "삑"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는 이제 이 접촉점에서 지나친 두려움, 불안, 위축된 모습의 방어보다는 교류와 소통,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저는 세상에 말을 이렇게 걸어보고 싶습니다.

쭈그러진 카드를 사용한 그 사람, 그 카드를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용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역할을 충분히 해내어 "삑"하고 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 이렇게 서로 상호성을 가지며 함께하는 "나와 너"로 존재하는 세상의 어느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영어로 발바닥 sole과 영혼 soul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땅을 밟는 저와 우리들의 발바닥은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을 당당하게 밟고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세련된 우리들이고 싶습니다.

그런 저와 우리들의 발바닥이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내딛고 섰을 때에, 우리들은 건강한 영혼인 것입니다.

*이 글은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의 당사자 목소리 공유 프로젝트 '세상에 말을 거는 사람들' 일환으로,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동료상담가로 근무하는 여성장애인 김은성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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