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장애 운동에 큰 울림을 준 ‘마이크 올리버(M. oliver)’ 교수가 지난 3일 영면했다.

장애학,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아버지인 마이크 올리버 교수를 추억하며 그의 삶과 의미, 세계사적 장애운동의 의미를 소개하려 한다.

M. oliver가 장애 학을 집약한 내용. ⓒ이상호

개인적 비극이론 vs 사회적 억압이론

중도이든 선천이든 장애의 은혜(?)를 입게 되면 대부분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 ‘니 인생은 끝났다’, ‘아마 병원이나 시설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고쳐질 것이 아닌 바에 치료와 재활이라는 미명아래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으며 전 씨 일가(전문가? 이하 전문가)의 장애인 대비 일방적 소득과 서비스의 불철저성을 M. oliver는 비판한다.

또한 M. oliver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비장애인이었을 때에도 M. oliver이고 장애의 은혜(?)를 입게 된 후에도 M. oliver 장애인인데 동네 강아지도 들어가는 구멍가게마저 그 놈의 문 턱 덕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회에 분노했다.

그는 곧 이것은 사회적 억압임을 깨달았다. 즉, 개인적 비극이 아닌 사회적 억압이라는 것이다.

개별적 치료 vs 사회적 문제

어차피 시설이나 병원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라 저주를 퍼 붓는다면 치료며

재활을 뭣 하려 하는가? 휠체어를 가로막는 계단을 때려 부셔야 한다. 즉, 장애는 치료나 재활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

의료행위 vs 자조

의료행위는 일정기간 동안만 유효한 것이며, 그것이 장애인당사자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계단을 때려 부술 수 있는 것은 명백히 자조이다. 장애인 스스로 사회적 억압에 대한 집단적 책임을 질 때 해결되는 것이다.

전문가 우위 vs 집단적 책임

세게 말하면 이렇다. 단 하루도 장애인으로 살아보지 않은 이가 어찌 장애인전문가인가 말이다.

오히려 장애인의 자조에 근거한 집단의 힘이 장애를 둘러싼 억압을 깨부술 수 있다.

한 명보다, 열명, 열 명 보다 백 명. 나아가 이 사회의 억압에 항거하는 수백만의 장애인의 군대 말이다.

전문 지식 vs 장애인의 경험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근방에 휠체어 당사자 50명이 접근할 수 있는 밥집이 있는지는 대한민국 어느 홈페이지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장애인조직 당사자간부님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르고 효과적이다. 즉 지식이 아닌 당사자의 경험이다.

장애사회에 대한 측정과 이에 대한 실천보다 장애인을 개발하고 있는 장애인개발원 홈페이지에도 물론 없다. 수많은 장애관련 석, 박사들이 있는 장애인개발원의 목표가 장애사회가 아닌 장애인 개인을 개발하겠다는 것은 블랙 코미디 쯤이 되겠다.

용어와 개념을 중시하는 이 땅의 장애인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무어라 할 것인가!

돌봄 vs 권리

활동보조는 자원봉사도 아니요, 주체가 활동보조인도 아니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객체이다. 즉, 주체는 장애인당사자다.

행위의 모든 과정과 결말은 돌봄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의 평등을 향유해야 할 장애인자립생활인 것이다.

통제 vs 선택

80년대 한국장애인복지에서 장애대중을 사회에 해가 되는 기생적 소비계층'(parasites-기생충)'으로 이 땅의 일부 전 씨 일가들이 명시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관계나 임노동에 의한 생산력이 월등히, 현저히 떨어지니 이렇듯 분석한 듯하다. 사람이 아닌 자본의 입장은 언제나 잔인하다.

이러한 잔인함을 자선이나 시혜로 포장했던 과거는 장애인당사자를 장애인복지전달체계에서조차 통제의 수단으로 그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폭행과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살인을 일삼았다. 물론 이는 일부이긴 하나 현재진행형이고

이를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의 찬탈 이외에는 없다고 M. oliver는 선언한다.

개인적 적응 vs 사회적 변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휠체어 장애인이 계단에 적응 할 필요는 없다. 사회적응 훈련, 인간승리 등등 엄혹한 차별과 억압에서 불가능한 정상이 되기 위해 소모되는 막대한 비용과 낙인을 감수하는 것을 시설과 재활이라는 미명아래 자행 해왔다.

M. oliver는 장애인 개인의 사회적 적응이 아닌 계단이 사회적 문제이며, 장벽이고 낙인이었던 것을 선언한다.

즉 계단을 때려 부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설과 재활은 1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생각도 없고 실천 역시 없었음을 명시한다. 하여 장애 학은 권력의 찬탈이다.

장애학,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아버지인 M. oliver 교수. ⓒbbc 캡처

장애 학에 앞서 M. oliver의 시각에서 그는 왜 이리도 분노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이는 곧 우생학으로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사회적 모델은 우생학 같은 관습들이 사회적 가치와 장애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잠재력과 가치에 대한 편견적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20만 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홀로코스트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M. oliver)

하여 한국의 장애 학이 전 씨 일가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장애대중에게 쉽게 다가서야 함에도 어렵다.

장애 학의 해설에서 영어로 된 원문이 의역인지 직역인지도 의심스럽고, 한국장애운동에 미치는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도 기술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장애 학의 깊이를 나누기 전에 인류는 세계사 적으로 장애인당사자를 광인의 배에 태워 먼 바다에 내보내 수장시키거나 마녀사냥으로 불 태워 죽였고,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잠재적 혁명세력이었던 정적과 빈자들, 장애인당사자들을

한데 묶어 국가의 권력으로 폭력과 살인으로 일관했다.

말만 달라졌을 뿐 자선, 치료, 재활을 돌아 결국 정신병원 혹은 수용시설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러한 우생학의 역사에서 장애 학의 탄생의 개연성이 있었음을 명시해야 장애 학은 강단에 머무는 학문이 아닌 장애운동의 현장에서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역동성을 가지게 될 것임에도 장애인을 학대, 살해했던 우생학의 역사와 분절되거나 단절되어 있는 현재의 한국의 장애 학이 서럽다.

장애 학의 준거, 이태리의 장애인당사자 그람시

나는 그가 1994년경 오타와에 있는 칼레톤 대학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그곳에서 그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를 언급함으로써 장애 권리를 다루었다. M. oliver가 개인주의의 이념적 구조에 대해 웅변적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이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장애 상황에서, 이것은 의료화, 규범성의 요구사항, 우생학 등을 통해 나타난다."(Oliver를 기리며 중에서. Ravi Malhotra 저)

M. oliver의 영감에서 두 인물을 빼 놓을 수는 없다. 영국 장애운동의 전설, 폴 헌트(H. hunt)와 Antonio Gramsci이다.

H. hunt는 시설생활인이었고 본능적으로 사회적 억압을 깨달아 Stigma(낙인)을 저술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시설에서 생활했을 때 영어를 몰랐고, 당연히 영어를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전설의 인물은 장애인 동지들과 각자의 학대와 차별의 과거력을 구술하기 시작했고, 이는 Stigma(낙인)이라는 책으로 우생학적 역사를 장애인동지들에 증거와 증언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장애인동지들의 삶과 증언에서 태어난 이 책은 학술적인 우생학의 저서보다

혁명적이었고 역동적이었다.

저술의 과정을 지켜보던 영국의 사회학자(사회복지학자들이 아니었다)들은 급기야 그가 생활하던 시설을 방문했고, 국가의 학대를 목도한 이들의 전언으로 인해 영국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영국이 저항했던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별 다를 것이 없는 삶을 국가의 이름으로 장애인당사자들이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H. hunt의 저술과 실천으로 영국은 비로소 영국장애운동조직을 탄생하게 한다. 이의 과거력을 통해 M. oliver 는 장애 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즉 죽어있는 문서가 아닌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장애운동의 실천으로서 말이다.

H. hunt가 학대의 역사를 통해 분노를 제공했다면 이태리의 위대한 성인Antonio Gramsci는 논리적 영감으로 제공한다.

"우리는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 놓아야 한다."

그러나 1800년대 이태리 독재 정권은 감옥에 Antonio Gramsci를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두뇌가 작동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Antonio Gramsci는 감옥 에서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분석은 더욱 예리해져 몇 년에 걸쳐 2,848 페이지에 달하는 필사본을 남겼다.

Antonio Gramsci가 죽은 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작성한 [옥중수고]는 그를 자주 면회 갔던 처형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Antonio Gramsci의 옥중수고는 헤게모니 론으로 재판되는데 요약은 이러하다. 지배에 의해 이 사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 피지배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서 유지되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즉 퇴행적 지식인들이 그들의 부와 명예를 위해 피지배의 자발적 동의의 논리들을 끊임없이 생산, 유포한다는 것이다.

Antonio Gramsci가 꿈꾸었던 것은 전선 중심의 기동전(war of manoeuvre)을 통한 반전이 아닌, 대중과 깊이 연계된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이 진지전(war of position)을 통해 서서히 대중의 상식을 바꾸고 세계관을 변화시켜 그들 스스로가 운동의 진정한 일원이 되게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Antonio Gramsci의 논거를 M. oliver는 이렇듯 재해석했다.

M. oliver는 1994년경 오타와 칼레톤 대학에서의 강연을 통해 Antonio Gramsci를 언급함으로써 장애 권리를 다루었다.

M. oliver가 개인주의의 이념적 구조에 대해 웅변적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이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장애 상황에서 이것은 의료화, 규범성의 요구사항, 우생학 등을 통해 나타난다.

이 강연에서 M. oliver는 Antonio Gramsci를 언급하며, 장애를 둘러싼 퇴행적 지식인들의 논거를 이렇듯 해석한다.

재활로 대변되는 과잉 의료 화, 장애인에게 자선의 대상임을 강요하는 규범성의 요구 및 강요, 학대와 사회적 살인을 일삼는 우생학이다.

단 몇 줄로 논거 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의 장애인은 퇴행적 지식인들에게 둘러 쌓여있다. 권리의 문제를 떠나서 비용의 문제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퇴행을 보상하는 막대한 비용과 도덕적 반대급부는 전문성이라는 미명아래 지금도 작동되고 있다.

M. oliver는 전선체적인 일시적 운동이 아닌 장애대중과 깊이 연계된 우호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이 진지전(war of position)을 통해 서서히 대중의 상식을 바꾸고 장애 관을 변화시켜 그들 스스로가 장애운동의 진정한 일원이 되게 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했다.

또 한사람의 장애운동의 성자가 길을 달리 했다. 생애와 그가 성찰했었던 장애 운동.

아마도

서러움, 그리고 분노이었을 듯하다.

H. hunt는 1950년대 영국 장애운동가이고, Antonio Gramsci는 1800년대

지식이며, 운동가이었다. M. oliver는 지난 3일 생을 마감했다.

이 세 분의 성인은 모두 장애인당사자이었으며, 진지와 혁명을 꿈꾸었다. 대략 수 십 권의 책이 재해석되어 전 세계 장애운동가들에게 강력한 동기와 논리적 무장을 제공하고 있다.

서재에 갇힌 논리가 아닌 때로는 피를 토하며 분노하고 때로는 정연한 논리로 퇴행적 지식인들을 압박한다.

이 분들의 역사와 저술을 건달의 한계로 상세히 보고 드리지 못한 송구함과 마주 서 있다.

다만 M. oliver 형님께서 다른 길을 정하신 며칠 동안 많이도 가라 앉아 있었다. 내공의 부재로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죄책감과 함께.

그 대!

의로운 뜻,

사라지지 않도록!

*이 글은 사람사랑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이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기고를 하실 수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