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8일(목) 국립국어원(원장 소강춘)은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삼성교육문화관에서 ‘보이는 언어의 기록, 수어사전’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국립국어원은 2010년부터 개최된 국제학술대회를 통하여 세계 유수의 학자들을 초청하여 언어 정책의 흐름에 대해 소통하고 언어 정책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선언한 ‘한국수화언어법’ 시행을 기념하여 2016년 ‘수화언어와 사회적 의사소통’을 주제로 학술행사를 개최한 이후 2018년에도 ‘보이는 언어의 기록, 수어사전’을 주제로 연이어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매회 다른 주제를 선정하여 행사를 개최하는 전례를 깨트리는 매우 파격적인 행보라고 볼 수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수어 말뭉치 중심의 수어사전(호주 맥쿼리 대학교 트레버 존스턴), 수어사전의 구조(덴마크 유시시 대학교 예테 크리스토페르센), 수어사전 편찬의 과제(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교 요한나 메시(농인)), 대한민국 수어사전의 현황과 발전 방향(한국 국립국어원 최혜원, 이현화), 미래의 수어사전(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토마스 항케) 모두 5개의 발표가 하루종일 이어졌다.

학술행사 발표자, 내빈들의 모습.ⓒ최혜원

한국수어 중심 사전으로 편찬 방향 전환

한국에서 수어는 그간 음성언어의 보조수단, 불완전한 의사소통 체계로 분류되었고, 농인과의 소통이나 교육을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수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러기에 한국어의 눈부신 발전에 비해 수어 연구 분야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문법 체계도 거의 정리되지 못하고, 변변한 대상별, 단계별 수어 교재도 없는 실정이다. 수어사전이 담고 있는 내용도 단순히 한국어를 수어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한국수어 표현을 담은 어휘 대응집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어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 한국어를 표현할 수어를 억지로 만들어 내기도 해서 “실제 사용되는 단어는 없을 때가 많고, 전혀 쓰고 있지 않은 단어는 많다.”라는 농사회의 지적을 내내 받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어 중심의 수어사전만을 접하였기에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였는데, 유럽과 호주의 수어 연구자들이 보여준 수어사전은 일반적인 언어 사전이 담고 있는 내용을 넘어선 것이었다.

농인들의 이야기, 대화, 발표 등을 동영상으로 기록한 대규모의 수어 말뭉치를 토대로 수어의 표제어(변이형 포함), 의미, 용례를 구축하고, 음성언어로 검색하는 것이 아닌 수어 형태 중심의 검색 방법을 채택한, 그야말로 수어사전만의 특성을 제대로 살려낸 것이었다.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일대일 대응을 넘어 한국수어의 어휘적 특성을 사전에 담아내는 일은 이제 한국수어 연구의 핵심적 과제이다.

국립국어원은 이용자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현재의 수어사전을 개편하여, 한국수어 학습자와 사용자를 위한 표현용 사전(한국수어-한국어 사전)과, 수어 사용자를 위한 한국어 이해용 사전(한국어-한국수어 사전)으로 나누어 구축하려고 한다.

축적된 연구 성과가 없는 한국의 현 상황에서 음성언어에 비해 수백 배의 노력이 드는 수어 분석 과정 때문에 수어사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긴 시간 동안의 구축 과정을 거칠 것이지만, 언어로서의 수어를 기술 대상으로 정확히 목표하고 언어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도는 한국수어 연구 발전의 큰 걸음을 내딛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농사회와의 지속적인 소통은 한국수어사전의 완성도를 높일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최혜원, 이현화(국립국어원) 발표 장면.ⓒ최혜원

이날 학술대회의 주인공은 농인

이날 300석 규모의 행사장을 꽉 채운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농인이었다. 특별히 수어를 연구하거나 평소 사전편찬에 관심이 있었던 농인뿐만 아니라 일반 농인들의 참여가 이어졌는데, 발표자의 발표 내용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발표마다 주어진 질의응답 시간의 주인공도 농인들이었다. 농사회에서 수어사전의 의미는 무엇인지, 농인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수어사전의 확장 가능성은 얼마만큼인지 질문 세례가 끝없이 이어지는, 그야말로 뜨거운 염원의 에너지가 행사장을 압도하였다.

학술대회 참가자들.ⓒ최혜원

이렇게 학술행사에서 농인의 활발한 참여가 이어진 데에는 ‘수어가 중심이 되는’ 학술 대회의 진행 방식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1, 2, 3부 내내 수어로 사회를 진행하였고, 한국수어, 한국어, 영어, 국제수어 사용자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국내 정상급의 통역사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국립국어원의 ‘대한민국 수어사전의 현황과 발전 방향’은 참가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주제였는데, 한국어를 한국수어로 통역하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두 발표자가 각각 한국수어와 한국어로 독립적으로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농인들의 눈빛 하나하나에 한국수어 발표자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농인들의 문화에 맞추어 설명하는, 이 학술대회에서 가장 빛나는 ‘교감’의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농인 연구자의 수는 매우 적고 수어 연구라는 전문 분야 진출도 초기 단계이다. 그간 한국수어 연구에서 농인 연구자는 농인 참여라는 구색을 맞추는 수단일 뿐 연구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왔다.

이러한 현실을 탈피하고 한국수어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농인 전문가를 길러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국립국어원은 올해 농인(2명) 등 수어 사용자 7명으로 구성된 사전팀을 구성하여 직접 수어사전을 정비하고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언어학이나 수어학을 전공한 전문가도 있지만, 수어를 진지하게 탐구할 열정이 있고 수어를 아는 젊은이들이 대다수이다. 수어사전과 연계할 한국수어 말뭉치 구축에도 수어에 대한 열정이 있는 농인들을 참여시켜 수어 전문가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할 예정이다.

*이 글은 국립국어원 특수언어진흥과장 최혜원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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