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의 대한 차별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진국과 후진국 할 것 없이 차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고, 피부색의 다름과 질병의 유무(장애 포함), 지식의 차이마저도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차별, 흑과 백. ⓒ안지수

다름을 인정하자고는 하지만 정작 우리 맘속에 내재된 생각은 타인의 성공이 배 아프고, 또 그 입장이 뒤바뀌면 철저히 무시하게 되는… 인정하기 싫지만 이것이 인간의 부끄러운 민낯인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의 연장선인 걸까요? 때로는 장애인인 것을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약자임에는 분명하고 또 부정한다 한들 세상이 찍은 동정의 낙인은 결코 지우기가 쉽지 않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이런 가정을 해 봤습니다.

“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장애인이고, 단 10%의 인원만이 비장애인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언뜻 생각해 봐도 굉장한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영단어의 표현을 빌자면 서프라이즈(Surprise) 하고 어썸(Awesome) 하지 않을까요?

사람은 보통 다수(多數)의 것에 동의하는 측면이 많으므로 거리를 활보하는 휠체어의 모습이 생경하지 않을 것이고 그 같은 풍경의 초석이 되는 도로와 인도의 편의성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활동이 많아진 장애인 인구 때문에 건물은 낮게 설계되거나 혹은 높다고 하더라도 엘리베이터가 의무화될 것이고 더불어 건물 내부는 전부 넓은 구조를 띄게 될 것입니다.

공중화장실의 세면대는 일률적인 위치를 갖게 될 것이며,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불상사가 없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겠죠. 뿐만 아닙니다. 택시와 버스 모두에 리프트 혹은 경사로를 설치함으로써 더 이상 이동을 포기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아마 비행기 역시 같은 이치로 설계되겠죠? 그리된다면 여행의 강자, 아니 박사가 될 겁니다.

직장에서도 서로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일하려 할 거고요. 더 나아가 상사에게 아무개 분과 일하게 해달라는 간청도 있을지 모릅니다. 장애인의 결혼과 출산이 활발해질 테고, 그 속에서 자라난 후손들이 아마 나라에 큰 이바지 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더 이상 성(性)에 대해 굶주리지 않고 건강한 성 의식이 퍼질 수 있습니다.

참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말한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엄청난 쇄신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혹 불편할 것 같다고 말씀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런 변화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편한 것입니다.

복지란 것은 원래 사람들 모두가 잘 살고자 하는 이유에서 행해지는 정책 아니겠습니까?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나라라면 비장애인들은 얼마나 편할까요?

앞서 비장애 인구를 조금 과하게 축소시킨 감이 없지 않지만 굳이 비장애 인구가 줄지 않더라도 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되면, 추측건대 모두가 행복해지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역동적인 장애인과 정적인 장애인을 구분 짓는 건 이닌지…. ⓒPixabay

이런 생각의 중심에는 서두에 언급했던 차별에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가자.”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말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멀리서 차별의 의미와 사례를 찾을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냉대, 그리고 배려 없는 말 따위는 사실 당사자들도 대수롭잖게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것들에 가려진 진짜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짜 차별인 것이죠.

인간이라면 응당 하고 살아야 할 이동부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가까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해도 장애인이 세상 속에 녹아들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학업과 직장, 연애와 결혼 출산에 이르기까지. 남들 다 하며 사는 것들을 하지 못하고 살면서도 한 번의 긴 한숨으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감내해야 하는 인생.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그들의 고통은 철저히 간과한 채, 듣기 그럴싸한 말로 도전과 꿈, 이상 등을 가르치듯 이야기하고,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기 전엔 모른다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르면 일단 침묵이 옳은 건 아닌지요. 모른다는 이유로 타인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쩌면 장애인이 바깥으로 나오기 쉬운 사회야 말로 함께 사는 사회의 시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쇠해져 하늘 본향으로 갈 때,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다행까진 아니더라도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참 잘 살았다는 자체평가를 내릴 정도의 그런 세상이 되길 말입니다. 그래서 훗날에 후손들이 오늘의 제 글을 봤을 때 ‘이런 시절도 다 있었어?’라며 신기해 할 수 있기를…

*이 글은 경기도 성남에 사는 독자 안지수님이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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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30대의 철없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주관적인 옳고 그름이 뚜렷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분노하고 바꿔나가기 위해 두 팔 벗고 나선다. 평범한 것과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고 항상 남들과는 다른 발상으로 인생을 살고픈 사람. 가족, 사람들과의 소통, 이동, 글, 게임, 사랑. 이 6가지는 절대 놓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최신 장애 이슈나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장애당사자주의적인 시각과 경험에 비춰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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