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만난 남편. 연애시절. ⓒ배은주

내가 만일 첫사랑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 모두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계시죠? 첫사랑의 기억은 모든 사람을 낭만주의자로 만드는 것 같아요.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르면 시도 한편 지을 수 있고 아무리 음치인 사람도 유행가를 흥얼거리게 되니까요. 1급의 지체 장애인이이면서 두 딸아이의 엄마인 제게도 첫사랑의 추억이 있답니다. 그때는 그 추억이 이토록 아름다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첫사랑의 실패에 이렇게 감사하게 될 줄도 몰랐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필요 없는 시행착오는 없는 것 같아요 실패가 있어야 반드시 성공하게 되니까요.

저는 첫사랑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결혼 할 수 있었고, 지금의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답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속으로 한번 빠져 보시겠습니까?

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답니다

저는 평생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제 몸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았죠. 제가 10대였던 그때는 장애인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시절이었어요. 어쩌다 언니 등에 업혀서 밖에 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제 등 뒤로 비수처럼 날아드는 말은 ‘병신’이란 말 이였답니다. 그런 세월을 살아가야 했기에 여자이기는커녕 사람대접만 받고 살아도 다행이다 싶었죠. 얇은 다리를 감추기 위해 한여름에도 내의를 입고 긴 치마를 입으며 어떻게든 두 다리를 가리려고 했었고, 어쩌다가 관심을 보이는 남학생이 있어도 으레 동정이려니 하며 무시해 버렸답니다. 그런 제게도 소설 같은 첫사랑이 찾아왔답니다.

친구 언니가 하는 일일찻집에 참석했던 날, 통기타를 치며 해바라기에 ‘내 마음에 보석상자’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한 얼굴을 한 그 남자의 노래에 나는 완전 매료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남자의 노래가 귓가에서 스치는 듯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 배은주씨 계신가요?”

“제가 배은준데…….누구시죠?”

“저. 며칠 전 찻집에서 노래를 했던 사람인데요, 배은주씨를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파란 옷을 입고 해바라기 노래를 멋지게 불려대던 그 남자가 내게 전화를 걸어 온 것입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그 남자를 만나러 나갔고 나를 보자마자 그 남자는 대뜸 사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 남자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의 시선을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휠체어를 살피고 있었어요. 그 후 그 남자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독서실로 책을 사들고 찾아오기도 하고 집 앞으로 찾아오기도 했지만 휠체어를 밀어주는 그 남자의 손은 부담스럽고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나는 이사를 하면서 연락을 끊어버렸고, 그 이후로 그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더군요

그 이후 대학에 도전했지만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한 후, 목발이라도 짚고서 다시 도전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여수애양재활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때가 내 나이 24살이었죠. 여덟 군데를 수술하고 지독한 통증과의 전쟁을 시작한 나는, 강하다고 믿었던 나의 정신력이 육체적 고통 앞에서 산산이 추락하고 있는 것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정신력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지독한 육체적 고통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게 됐습니다. 침대에 누워 하루하루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게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단호하게 때론 느끼하게 말입니다.

누워서 지내는 내게 그 남자의 목소리는 유일한 소일거리가 됐습니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남자도 알았을까요? 무릎이 아파 입원을 했던 그 남자는 물리치료 받는 기간이 거의 끝나 가는데도 퇴원할 생각을 않고 매일같이 내게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 마침 집안에 갑작스런 일이 생겨서 간호를 해주던 어머니께서 급히 서울로 가시게 됐고, 나 혼자 병실에 남아 간호해줄 사람을 알아보고 있는데, 선뜻 그 남자가 나를 간호 주겠다고 나셨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 남자가 매일같이 제 머리를 빗겨주고 감겨주고 밥을 먹여 주면서 극진히 보살펴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성어린 간호 때문일까요? 예정보다 빨리 깁스를 풀고 물리치료를 시작할 즈음 그 남자는 첫사랑의 그 남자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우리 사귈래?”

순간 저는 그 남자의 눈을 봤습니다. 그 남자의 눈은 제 휠체어가 아닌 제 눈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 대답은 오케이였지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매일같이 들을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요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장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시련은 다가오더군요. 그는 장남 이였고 저의 장애가 너무 심한 것이 우리에게는 시련 이였습니다. 그에 집안과 저의 집을 비롯해서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기 시작했어요.

“너희들은 절대 안 돼. 너만 상처받을 거야. 남자야 무슨 손해니? 연애하다 헤어지면 그뿐이지 그렇지만 너는 여자고 또 장애도 심하고.”

나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정말 상처받게 되면 어쩌나 끝끝내 그의 집안에서 승낙이 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저는 점점 지쳐 갔습니다. 그런 제게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그 남자에 한마디가 다시 용기를 내게 했습니다.

“나는 길거리에서 자전거 바퀴만 봐도 좋아 내 맘 알겠니?”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하죠. 온몸에 엔도르핀이 돌기 때문에 거의 기분은 일종에 환각상태에 빠지게 되고 판단력은 극도로 흐려지게 됩니다. 진전한 사랑만 있다면 우리가 가진 장애는 오히려 사랑을 더 돈독하게 해주는 끈이 될 수 있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용기겠죠. 그때부터는 저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더군요. 모든 일에 용기를 생겼습니다. 그 남자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게 됐고, 그 남자 역시 제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었습니다.

꿈같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 사진. ⓒ배은주

꿈같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다

그 남자와 나는 일주일에 한번 데이트를 하며 여느 연인들과 똑같이 지냈답니다. 물론 우리들의 데이트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고 어쩌다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 남자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쯧쯧쯧…. 훌륭한 일을 하는구먼. 젊은이 복 받을 껴.”

그때만 해도 아니, 지금까지도 건강한 사람이 휠체어 탄 여자와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면 훌륭한 일을 했다고 칭송을 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죠. 어쨌든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죠. 그런데 이게 웬 맑은 하늘에 청청병력입니까? 제가 자가운전으로 퇴근하던 길에 음주운전을 하고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차량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고로 2년여에 걸쳐 수술하고 간신히 목발을 짚고서 일어날 수 있었던 저는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었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시 1년 4개월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죠. 저는 그때 그 남자가 저를 버리고 떠나갔으면 했답니다. 너무나 힘들게 망가져 버린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 이였죠. 그러나 그 남자는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리려 회복가능성이 없다는 병원의 진단을 무시한 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 사랑이 기적을 부른 걸까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저는 1년 4개월 만에 다시 예전처럼 고통 없이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다음해 4월 저는 드디어 꿈같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을 수게 되었습니다.

결혼, 장난이 아닌데……

결혼, 그것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신혼여행 때까지만 낭만이고 환상이고 여자들의 로망인 것입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실 이였습니다. 영원히 저를 공주로 떠받들어 줄 것 같던 그 남자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제게 와이셔츠와 장바구니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다림질을 하고, 시장을 봐가지고 와서 저녁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본 적이 없는 저는 거스름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 이였고, 은행 업무도 볼 줄 몰랐습니다. 나를 보면 항상 웃어주던 그 남자는 이제 나를 보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출근하면서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데도 늘 잊어버리는 바람에 부부 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무언가를 결심해야 했습니다.

“그래! 결심했어. 이제는 철저하게 주부로 아줌마로 사는 거야! 결혼한 이상 결혼생활 성공해야 진짜로 성공하는 거야!”

저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500원을 아끼기 위해 먼 곳까지 휠체어를 타고가 반찬을 사오기도 했으며, 동네 아줌마들과 어울리어 살림의 노하우도 배웠습니다. 나는 오리지널 주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여성이 가정의 주체가 되어야만 가정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년 후에 예지가 태어나고 둘째 예슬이가 태어났습니다.

가정, 그것은 작은 천국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이 멀리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행복을 꿈꿉니다. 지난날을 돌아오면 저의 모든 삶속에 행복과 불행은 늘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리느냐에 따라 나는 행복했고 또 때로는 불행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 장애 속에 빠져만 있다면 우리는 그저 장애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장애 너머에 있는 우리의 인생을 바라본다면 장애란 한낱 인생에 작은 조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장애인일수록 가정을 이루고 가정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마트로 쇼핑을 나온 장애인부부를 본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두 사람이 어떤 부부보다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장애인 여러분! 부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신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사랑의 화살을 마구 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쏘시는 화살을 맞은 사람은 절대 여러분의 장애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정을 이루셨다면 최선을 다하십시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충실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합니다. 가정, 그것은 작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그것은 작은 천국입니다. 가족 사진. ⓒ배은주

*사랑도 코치가 필요합니다. 에이블뉴스는 장애인 러브코치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러브스토리를 적어 보내주시면 됩니다.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ablenews@ablenews.co.kr

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서 장애인이 됐으며 초·중·고교 과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96년도에 제1회 KBS 장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노래를 시작하게 됐고 97년도에 옴니버스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작품현상공모’에서 장려상을, 2006년 우정사업본부 주최 ‘국민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2006 전국장애인근로자문화제’ 소설부분 가작에 당선되었다. 현재 CCM가수로도 활동 중이며 남녀 혼성 중창단 희망새의 리더로, 희망방송의 구성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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