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한국밀알선교단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장애인 선교에 발을 들여놓았다. 장애인(長愛人)으로 장애를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생긴 이후였다. 사실 이러한 변화가 있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Moses)가 히브리 민족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내라는 야훼(Yahweh)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모세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자신이 부적격자님을 내세운다. 급기야는 "언어에 장애가 있기에.."라고 말한다. 이에 하나님은 "누가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을 만들었느냐 나 야훼가 아닌가?"라고 모세에게 반문한다.

신구약전체에 나타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애인에 대한 생각은 "죄(αμαρτία)"와 직결되었다. 어거스틴 등도 죄는 선의 결여(善의 缺如), 완전하지 않은 것, 즉 불완전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구약의 정결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장애인은 부모의 죄 혹은 자신의 죄,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장애를 만들었다"고 단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하여 장애는 만들어졌다”고 말씀했다.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분이 만든 작품이 장애요, 죄와 연결지었던 세상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일(거룩함)과 장애를 연관시킨 예수님은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필자는 최근 경도의 장애를 가진 신학자와 장애인 선교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학자는 "장애를 하나님이 만들 리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하셨다. 나는 "우연이란 용어를 허용하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장애는 필연의 사건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속으로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장애에 대한 소극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장애를 만드셨다는 말씀조차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하긴 장애(障碍)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를 가진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애는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피하고 싶은 일이다. 자신과 무관한 것이기를 바라는 것 중의 하나가 장애이다. 그래서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고 울부짖었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의 노랫말은 바로 절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장애(障碍)에 국한된 말일까?

미국 프로축구에서 스타가 된 혼혈아 하인스 워드(Hines Ward)와 같은 부모가 피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국적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절규의 한이 있을 것이다. 하인스 워드는 "나는 한국인임을 부끄러워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인 어머니를 가장 자랑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이는 장애(障碍)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인스 워드가 한국국적을 부끄럽게 생각하다가 사랑하게 된 것처럼, 장애(障碍)를 가진 사람들이 장애(障碍)를 장애(長愛)하게 되면 결론은 달라지는 것이다. 장애가 고통스럽다. 때로는 창피한 일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손가락질 받았던 시기도 있었다. 피하고 싶은 운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피할 수는 없다. 장애는 내 몸에 있고, 내 마음에 있고, 나와 분리할 수 없는 내 인생의 중대한 사건이다.

중요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이 흔적, 이 사건을 언제까지 부정하려고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피부가 검은 흑인 소녀가 백인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냇물에서 자갈로 자신의 피부를 긁어내면서 빨간 피를 흘려내는 이야기를 읽는다. 그녀의 검은 피부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를 함께 살아가야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백인이 더 큰 문제 아닌가? 흑인 소녀는 자신의 검은 피부를 사랑해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 할 당사자였다.

마찬가지이다. 장애((障碍)가 장애((障碍)로만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장애를 만들 리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장애((障碍)가 장애(長愛)가 되면, 하나님이 장애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다.

장애! 이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연히 생긴 피할 수 없는 저주도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신 축복의 사건이다. 고통스럽지만, 축복의 증거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이 주신 장애! 나는 이를 사랑한다.

내가 늘 함께 하는 정신지체인, 자폐인 등의 발달장애인들. 나와 같이 지팡이에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이동할 수 있는 중증 지체장애인,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 소리를 만들 수 없는 언어장애인. 이러저러한 장애를 함께 지니고 있는 뇌병변장애인. 이와 같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표현으로 장애를 규정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놀라운 능력의 통찰력이 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므로 이미 고통의 깊은 의미를 통찰한 사람이 바로 장애인이다. 발달 장애인을 통해서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비결을 배울 수 있다. "무소유(無所有),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세계는 산에서 도를 닦는다 해도 얻을 수 없는 삶의 경지이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은 이미 이 경지에 도달해 있다. 이동에 어려움이 있는 지체장애인으로 하여금 세상이 얼마나 편리해졌는가?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등 일반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닌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 방식을 개발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지금이 컴퓨터를 누가 사용하고 있는가?

최근에 고용촉진을 통한 양극화 해소(兩極化 解消)가 주된 이슈이다. 자세히 보라. 장애인 분야가 사회의 주된 문제가 되고, 정책방향이 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 분야에서 직장을 갖게 되었는지를. 장애인 분야는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분야가 아니라 수많은 일반인 실업자를 근로자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장애인만을 취업하게 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을 고용의 현장으로 이끌어낸 분야가 장애인 복지, 재활분야이다. 이 땅의 가장 많은 고용률을 증진시킨 것이 장애인 분야이다. 가장 생산적인 분야가 바로 장애인 분야이다.

장애인을 언제까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적극적이고 생산적이고,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장애(長愛) 그 자체이다. 이는 장애를 그저 좋게만 바라보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다. 장애가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것임을 사회 현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증거가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신구약 전체에서 장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장애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장애인을 멀리하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장애인과 함께 하셨다. 장애인이 있는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장애인이 있는 그곳에서 선교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장애인을 통해서 주어진 축복들이다.

장애!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만든 축복의 통로이다. 하나님은 축복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장애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장애를 고통스럽지만, 불편하지만, 사랑한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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