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역사는 짧다. 짧은 만큼 미성숙한 모습을 일관성있게 보여주고 있다. 공(功)보다는 과(過)의 지적에 혈안이 되어 있다. 영웅을 만들기 보다는 역적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위대한 정치가를 세우기 보다는 처참한 배신자를 양산해 내고 있다. 정치가에게 완전한 인간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정치가란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위하여 그 시대민초를 위한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불쏘시개애 불과하다. 불쏘시개는 단지 불쏘시개일 뿐이다. 물론 당사자는 장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정치가 보다도 정치가를 바라보고, 정치가를 선택하는 기준과 철학을 가진 유권자이다. 그가 어떠한 정치가-과연 후보들 중에 최고의 후보자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가장 덜 나쁜자를 선택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기는 하지만-를 세우느냐는 것은 선택되어진 정치가 보다는 선택한 유권자의 책임과 몫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철저하게 지방색에 근거한 무정책(無政策), 유권자 무시(有權者 無視), 1인 중심의 정당정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미숙한 정치의 밑바닥에는 지방을 근거로 한 정당정치에 그 원인이 깊게 깔려 있다. 이러한 지방정치를 이용하거나, 지방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권자와 후보, 그리고 정당 모두가 미숙한 정치의 책임자이다. 나는 바람직하지는 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지방 중심의 토양에서 은근히, 그리고 형식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고 했던 김종필식의 정치에 찬사를 보낸다. 충청도라는 지역정치는 호남과 영남의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차지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주역은 아니지만, 캐스팅 보트(casting voter) 역할을 통하여 두번에 걸친 대통령을 만들어내는데 주역을 감당했다. 물론 마지막에는 팽을 당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정치 형태에서 우리는 배울 것이 있다. 절대다수가 되지 못하는 집단이나 세력이 그소수의 힘을 가지고 어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논리적 타당성, 합리성에 근거한 호소력을 가지고 소수가 다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는 교과서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인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힘을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노력이 펼져지는 장이 정치이다. 힘이 없는 정치를 선택하려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가 더럽고, 유치하더라도, 사람들이 나서는 이유는 아직도 정치에 영향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힘을 갖기 위하여, 거대한 힘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주변에는 힘 지향적 존재, 권력 지향적 존재들이 늘 함께한다.

이러한 정치 현실에서 소수에 해당되는 세력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그 가능성을 김종필식의 정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영남과 호남이 가장 두드러지게 지방에 근거한 투표를 함으로서 정치권력을 생산해 냈지만, 정치의 댓가를 누리는데에서는 그다지 혜택을 보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호남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의 의사를 가장 소홀히 여기는 당은 누구인가? 영남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의 의사를 가장 소홀히 여기는 당은 누구인가? 두말할 나위 없다. 각 지역 주민에 의하여 선택된 후보가 아니라 당에 의하여 선택된 후보이다. 다시 말하면 당의 선택이 주민의 선택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 한, 주민의 의사는 반영되기 힘들다. 여기에 정책정당, 유권자에 의한 정당은 부재하다. 우리의 정치가 살아있고, 영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주민의 힘을 두려워하는 정치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기존의 선택방향에서의 급격한 전환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호남에서 한나라 당 후보다 많이 당선되는 것이고, 영남에서 한나라당 이외의 후보가 많이 당선되는 것이다. 당에서 선택되면, 지역에서 자동으로 선택된다는 공식이 무너질 때 정치는 올바른 길을 걸어가게 되고, 우리는 그나마 조금나은, 그리고 경쟁력있는 국회입성자,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현실이 전개되어 가도록 노력한다고 전제할 때, 장애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쟁치하기 위한 장애인의 정치참여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사회 현실에서 가장 소수자는 복지서비스를 받아야 만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 장애인은 소수자 중의 소수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수자에 해당되는 장애인이 장애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장애인이 이 사회의 주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장애인 집단이 캐스팅 보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장애인 후보자를 정치현장에 내보내는 일과 장애인 후보자로서 나서는 일이 먼저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장애인 현장의 합의(consensus)가 가장 중요하다. 즉 지방의 이익보다 특정 집단 특히 소수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정치세력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나선 정치참여자는 혼자가 아니라 장애인계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적어도 정당의 신념이나 방향보다는 장애인 현장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체적인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종종 당을 달리한다 하여도 장애인의 권익을 위한 같은 방향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토론과 합의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장애인 전체를 하나의 세력으로 이끌어내는 철저한 헌신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반 정치 현장에서의 결정적인 역할, 장애인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정치판의 현실이 조정될 수 있는 그 위치에 서 있도록 해야 한다. 즉 한국땅에 살고 있는 장애인이라면, 지방, 정당보다는 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하여 온전히 하나된 결속력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미숙한 정치현장을 성숙한 정치현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장애인이 정치 현장에 전면으로 나서야 한다.

이러한 정치현장에 구체적인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장애인 모두의 하나된 전폭적인 지원을 하여야 한다. 장애인 현장에 얼마나 많은 산적한 의제들이 있는가? 장애영유아에서 부터 장애 노인에 이르기 까지, 장애여성과 관련된 의제, 그리고 조기 진단에서 부터 교육, 의료, 심리, 사회 재활과 아울러 직업재활에 이르기 까지 너무도 많은 의제들, 해결해야만 하는 의제들이 많다. 이와같은 의제와 연관된 당사자들이 너무도 많다. 장애인과 그 가족 중에 이와같은 의제와 무관한 존재는 하나도 없다. 이러한 다양한 의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토론하고, 단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정책의제를 선정하는 것, 그리고 그 의제를 정책과제로 만들기 위한 절차적인 과정, 그리고 그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들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일들을 정치라는 행위를 통해서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투명하고 헌신적인 정치참여가 전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로 그러한 때가 지금이기 때문이다. 비로서 장애인 전체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토대인 지방선거에서 부터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통해서 장애인의 권리가 신장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영향력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와같은 모든 과정에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