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리 이승복님.(이승복님의 다음 카페http://cafe.daum.net/supermanDrLee사진제공)

88서울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기 위해 맹훈련 하던 중 사고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된 이승복씨. 각고의 노력 끝에 쟁쟁한 미국인 의사들을 제치고 세계 최고 병원인 존스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과 수석 레지던트로 우뚝 서다.

이미 지난해에 (저는 보지 못했지만) TV를 통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울렸던 존스홉킨스 병원의 수석 전공의인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이승복씨(40세)를 얼마 전 장애아동을 돕기 위한 일일호프에서 만났다.

몇몇 분들은 인터뷰하기에 힘들 거라고 하셨지만, 막상 만나보니 얼굴에 미소가득, 환한 얼굴에 묻는 질문에 조근 조근 이야기도 잘 해주셨다.

이승복씨는 여덟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약사이시던 아버지가 약국 생활을 답답해한데다 당시 가족 이민 붐에 힘입어 이승복씨 가족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행을 결심했던 것인데, 그러나 미국 생활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기 했지만 부모님은 미국에 가면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고, 화목한 가정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님은 언제나 바빴고, 언어 문제에 인종 차별까지 당해야 했던 저는 어린 나이에 여러 면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장남으로서 큰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운동선수로 성공하면 부모님의 사랑도 되찾고 한국에서처럼 화목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절 놀린 미국 아이들의 코도 납작하게 해 줄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는데..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의 체조를 시청 하면서 체조선수로서의 결심이 확실해졌다고 말한다. 매 경기마다 10점 만점을 받는 그녀를 보고 어린 마음에 그는 금메달을 따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가족, 고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고, 올림픽 금메달 획득은 그런 그의 유일한 꿈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오랜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 훈련 도중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이승복씨는 그것이 인생 최대의 고비인지도 모른 채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오로지 훈련소 복귀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입원한 지 3개월 무렵, 의사가 그에게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 그는 심한 절망과 분노에 화가 났다.

슈퍼맨이 된 닥터 리 이승복님.(http://cafe.daum.net/supermanDrLee사진제공)

“제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다시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실망스럽고 화가 났어요. 그러나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어요. 만약 제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한 교통사고나 총기 사고 때문에 척추 손상을 입었다면 평생 그 분노를 그들을 미워하는 데 허비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다친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제 잘못이었으니까요. 분노를 쏟아낼 대상은 제 눈앞에 놓인 현실을 빨리 직시하고, 재활 훈련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요. 희망이 에너지가 되듯 분노 또한 에너지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몇 개월동안의 재활치료와 물리치료를 열심히 했던 덕분인지 혼자서 병원 곳곳을 누빌 수 있었고, 가능한 근육을 거의 모두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를 보고 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은 “환자 중에서 이렇게 재활 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본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느 날 조무사가 건넨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는 의학 공부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꼈다. 어려운 의학 서적들과 달리 쉽게 쓰인 그 책을 읽으며 자신이 치러야 한 고통스러운 재활 훈련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환자에 대한 의사들의 권위적인 태도 또한 그가 의사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하다.

환자 치료를 하는 이승복님.(http://cafe.daum.net/supermanDrLee사진제공)

그는 의사들이 환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고, 의무적이고 딱딱하게 환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고 말 한다. 다른 환자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환자가 원하는 의사’가 되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다지 좋은 머리도 아니고, 체조선수일 때도 공부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그가 공부를 하겠다고 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겠다고 결단을 내린 순간 한숨이 나왔어요. 공부가 쉬운 것도 아니고, 저한테 맞지도 않았거든요. 앞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만 먹고 덤벼들긴 했는데...힘든 길이었어요. 힘들 때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그만 두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그런 마음이 들어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라고 말한다.

그럴 것이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몸에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을 텐데...어떻게 공부를 하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남들보다 두세 배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했구요. 남이 4시간 공부할 때 8시간 공부했고, 남보다 두세 시간 덜 잤어요. 보통 의대생보다 좀 더 힘든 의대 생활을 했지만, 체조선수 시절 쏟은 열정으로 학업에 매진한 결과, 첫 목표이던 뉴욕대에 입학 할 수 있었어요.”

이승복씨가 낸 자서전 '기적은 당신안에 있습니다' 표지.

이승복씨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끝에 뉴욕대를 입학하고 졸업 후 콜롬비아대 공중보건학 석사를 마치고 명문 다트머스대에서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시작, 하버드 의대에서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가 인정하는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된 것이다. 그는 미국 내 단 두 명뿐인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중 한 사람이기도 하며, 그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 온 이후 스스로 장애자체를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승복씨는 자신의 현재가 장애인들의 미래가 되고,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방송을 하면서 또 글을 쓰면서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분야에 우뚝 선 장애인분들을 만나지만, 이번처럼 가슴 뭉클하고 찐한 감동이 밀려오는 건 뭘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인상을 남겨준 이승복님께 감사드리며,

'이승복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팬 카페가 있습니다.

주소는 http://cafe.daum.net/supermanDrLee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시기 바라구요.

책...너무 좋습니다. 아마도 책을 읽고 나시면 후회하지는 않으실 듯.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길을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겁니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병원에서는 승복씨를 가혹한 운명에 맞서 승리한 슈퍼맨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에게도 두려움이 없었던 게 아니다.

누구보다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자신의 한계보다 더 큰 꿈을 꾸었다.

- KBS 인간극장 '슈퍼맨, 닥터 리'中

사람 만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김진희씨는 지난 97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사고를 당하기전 280명의 원생을 둔 미술학원 원장이기도 했던 필자는 이제 영세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에게 재활보조기구나 의료기를 무료로 보급하고 있으며 장애인생활시설에 자원봉사로 또 '지구촌나눔운동'의 홍보이사로 훨씬 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방송작가로 또 KBS 제3라디오에 패널로 직접 출연해 장애인계에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음식을 아주 재미있고 맛있게 요리를 할 줄 아는 방년 36살 처녀인 그녀는 장애인 재활보조기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이트 deco를 운영하고 있다. ■ deco 홈페이지 http://www.uk-or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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