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Passion of the Christ 에서)

사순절(四旬節)기간이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40일간을 말한다. 사순절 기간 중에는 인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기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예배당마다 십자가가 서 있다. 십자가는 그것도 붉은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Symbol)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난이 장애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실 그렇기도 한 것이 병자와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지만, 장애인과 예수님을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예배당이 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그러하여도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과 예수님의 고난은 장애인과 너무도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반복해서 말하면 사순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기간에 장애인을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Passion of the Christ 에서)

그러면 왜 예수님의 고난이 장애인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인가? 대단히 많은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바라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의 예수님을 생각해야 한다. 특히 오히려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가 그들과 함께 하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의 처형으로 몰아간 것은 유대의 기득권자들이다. 그들은 제사장, 서기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요사이 국회의원) 등의 지배계층이다. 당시의 정치권력, 종교권력을 가지고 휘두르고 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고, 능력 있는 말씀을 하였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당시의 기득권자들과 친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기억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통을 절규하시는 예수님(Passion of the Christ 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기득권층을 향하여 저주의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독사의 자식들아!"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삶의 대부분은 당시의 가난한 자들, 장애인과 함께 하였다. 사실 이들은 당시의 기득권자들에 의하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중(Mass)이었다.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하였다. 단순히 같이 한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았다. 그들 중에 대다수(Multitude)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화려한 궁궐이나 회당 그리고 사원에 계시지 않았다. 그곳에서 권력자들과 함께 하는 일은 볼 수 없었다. 도리어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싶어 하는 장애인들.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人間)"으로 인정해주고, "인격적(人格的, Personally)"으로 대해주던 존재가 예수님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커녕 죄인 중에서 가장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인정받고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고, 함께 이야기를 하고, 함께 들판을 거닐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면,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들판에서도, 바닷가에서도, 산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손쉬웠다.

예수님의 손에 박혀진 못(Passion of the Christ 에서)

예수님은 장애인을 사랑했고, 일순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랑(長愛)하였다. 너무도 많은 장애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기득권층에게는 위협으로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으로 인정받고 있는 장애인들의 세력화를 두려워했다. 그 중심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사실 이들은 세력화를 꿈꾸지도 않았다. 그저 이 땅에서 일반 사람과 같이 사람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존중받고 살아가는 일에 기적 같은 희열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예수님도 이들을 세력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전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가는 것이고, 이 땅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득권층의 잘못된 계산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길로 몰아갔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의 손과 발에 굵은 못이 박히고 피를 흘리면서, 때로는 절규하면서.... 십자가에 달리면서 예수님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랑의 눈길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 중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이 할 일은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믿음의 눈으로. 그러나 사흘 뒤 죽었던 그 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꺼져가는 희망이 아니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장애인의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장애인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고난이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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