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가지고 살아왔다. 분명 장애는 장애로 남아있다. 아마도 이 땅에서의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장애는 지속될 것이다. 나에게 있는 장애는 나의 마지막과 더불어 종말을 고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떠난 세상에도 장애는 남아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모양이든 간에 장애가 사라진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애를 완전히 없애려는 노력 역시 중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새로운 장애는 나타날 것이고, 그러한 장애를 제거하려는 노력, 그러한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이다.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기 시작한 날부터 계속 이어져 온 역사이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이다.

나의 몸에 장애(Impairment)는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 장애(Impairment)로 인하여 또 다른 장애(Disability)는 동반되었다. 다리의 손상은 걸을 수 없고, 뛸 수 없는 상태를 만들었다. 이러한 나를 보고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다리가 불편하니까 손재주가 있거나 머리가 좋을꺼야!" 그렇다. "다리가 불편하니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부정적인 말보다는 좋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갑자기, 돌연히 손재주가 좋아졌다거나 혹은 머리가 좋아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다리를 불편했고, 걷는 일은 불가능했고, 그러한 신체에 더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나의 신체에 일어났던 우연한 사건은 나 자신의 신체에만 국한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난한 집, 그리고 2층집에 살았던 나는 초등학교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학교에 가기까지는 집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전 세계(全世界)는 자그마한 방 한 칸이 전부였다. 거기에서 나는 "혼자 노는 법"을 배웠다. 아니 터득했다. 그 이유는 혼자 놀지 않으면 안 되는 실존상황(existential situation)이 나의 환경 전체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할 수 없는 현실, 방구석 이상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 작은 세계관. 어느 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의무교육이란 우산 아래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나의 세계를 부숴버렸다. 산산이 조각내고 있었다. 나의 껍질은 단 한순간 만에 조각되어 갑자기 날아온 동풍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또 다른 껍질이 나를 싸안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버스를 이용할 수 없었던 나는 사방 3Km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구입한 지팡이에 온 인생을 얹혀놓고 질질 끌리는 마비된 발로 사방 10리도 되지 않는 세상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집 바깥을 벗어난 나에게 학교와 교회 그리고 작은 동네는 좁지만 편협하지 않는 세계관을 갖게 하였다. 교회와 학교는 통합된 사회를 경험하게 했고 이 땅을 넘어 저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가보지 않았지만, 이 땅 너머에 무엇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것은 또 다른 동경과 희망을 갖게 하였다.

다만 지팡이에 온몸을 싣고 다니는 인생에 있어서 사방 10리가 한계였다는 사실은 나를 괴롭게 하였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고등학교 입시를 앞에 두고 모두 자신의 실력에 준하는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나마 이 또한 또 다른 특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중학교 다닐 때에 나와 동급생 중에는 지체장애인이 15명 정도 있었다. 그 중에 대부분은 일찍 철이든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70년대 초반 지팡이를 짚고 살아가야 할 세상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고 학교를 중퇴하거나 학교 다니는 일을 무의미하게 생각하였다. 철이 아직 들지 않은 나는 단순하게 학교생활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을 때 나는 다른 친구들과 같지 않음(?)을 처절하게 느꼈다.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 (something is different)을 알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님(different is not wrong)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에 젖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나는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특수하지 않지만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A different is not a special, but an extraordianry)을 생각했다. 특수하지 않게, 그러나 특별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 혼자 자립하면서,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나에게는 사회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회에서 제공하는 배려가 시혜(施惠)가 아니라 권리(Rights, 權利)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단 권리를 누리지만, 감사의 표시는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것이 장애를 가지고 살지만 장애를 거부하거나 장애를 느끼게 만드는 사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인정하고, 장애를 사랑하는 자의 마땅한 삶의 자세라고 받아들였다.

무엇이 장애인지, 어떤 것이 장애인지 이를 규정하는 일은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지나면서 계속될 것이다. 장애란 단어 그 자체에 역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장애란 단어 그 자체에 역동성(dynamics)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 그 용어 자체는 인간과 환경이 결합된 생명력 있는 것이기에 어느 한 시점에서 명료하게 규정할 수 있지만, 그 규정된 내용이 역사 전체를 규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장애를 어떻게 규정하던 간에 장애라 일컫는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동일한 고민을 하고 동일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르지만 특별하게, 그러나 특수하지 않은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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