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맞이하여 귀성 길에 안전운전 하라는 메시지들이 여기저기에서 날아온다. 짧은 글이지만 이걸 읽으면서 운전에 얽혔던 일들이 새삼 떠올랐다. 며칠 전에도 운전 중에 고마움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다.

시내 한 복판의 모처(某處)에서 오찬간담회가 있었는데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디쯤인지는 대강 알고 있고 지도를 통해서 확인도 한 상태지만 시내 한 복판은 까딱 잘못 들어버리면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 일쑤고, 일방통행이 많아 유턴을 하거나 디귿자로 돌아오기는 어려워진다. 그런데다 공간개념이 엄청 박약한 나로서는 방향을 읽고 허둥지둥 찾다보면 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이 날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실수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 택시기사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여태 수없이 길에서 헤매곤 했지만 언젠가 단 한번밖에 사용해본 적이 없는 비법(秘法). 을지로에서 빈 택시를 찾아 앞장 서 주실 것을 의뢰했다. 당연히 요금은 지불하겠다는 말과 함께.

처음에는 내가 예상하던 길로 무난히 나아갔다. -돈이 아까워지려고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복병이 드디어 나타났다. 나 혼자라면 판단내리기 어려운 시점이 나타난 것이다. 어딘가 차를 세울 곳도, 물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항상 이래서 막판에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택시는 샛길을 뚫고 유유히 잘도 달려간다. -휴유! 가슴이 펄떡거린다. 혼자 왔으면 어쨌을꼬!!!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바로 앞까지 왔다고 택시기사가 손짓을 하는데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질 않는다. 다시 숨이 펄떡거리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택시를 따라갔다. 커브를 돌아 다시 큰 길로 나오고 나서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다시 안도의 한숨!

그런데 기사는 그쪽으로 가라는 손짓만 해주고는 그냥 앞으로 달려가 버린다. “아저씨, 아저씨, 요금~” 급한 김에 크락숀을 빵빵 울렸지만 기사는 그냥 쓱, 가버리고 말았다. 고마운 마음으로야 열 번도 더 쫓아가고 싶지만 도착을 확인하는 전화가 삐리리, 삐리릭 울리고 있었다. 또한 그 아저씨가 좋다고 쫓아갔다가는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

사실 이것보다 더 고마운 일도 있었는데, 생명과 직결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몇 년 전 부산에서 혼자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길이 뻥 뚫려 있어서 나같이 소심한 사람도 130킬로 이상으로 막 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휴게소에 들렸다가 나왔는데 핸드폰을 걸어놓은 지지대에서 달달달 떨리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러지? 의심이 들어서 계기판을 살펴보아도 별 이상이 없었다. 더구나 부산으로 내려오기 전에 정비소에 들러 점검까지 마친 다음이었다. 괜한 걱정이야~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다시 130킬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 많이 흔들렸지만 중부고속도로는 경부고속과는 달리 시멘트 바닥이어서 원래 승차감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에 떠올렸다.

달리는 중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길래 주행선으로 바꾸고 속도를 줄이면서 전화를 받았다. 얼마 전에 늦은 나이에 중(스님)이 되었다는 동창이 전화를 한 거였다. 사람도 살지 않는 오지에 절을 차려놓고 혼자서 고생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약간의 시주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감사하다는 전화를 해온 것이었다.

흐흥, 인사를 받을 만큼의 액수도 아니었고, 앞으로 더 할 의향도 없어서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 여운으로 천천히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나한테 손짓을 막 하는 것이 아닌가? 으응, 무슨 일이지? 차문이 열렸나? 다시 계기판을 보아도 아무 흔적이 없었다. 불안으로 가슴이 쿵덕거리기 시작할 때쯤 고급 승용차 한대가 나한테 세우라고 손짓을 하고는 젊은 신사 한 분이 차에서 내렸다.

문제인즉슨, 타이어에 심각한 결손이 생겨서 차가 흔들거린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달리면 안 된다면서 IC를 벗어나 정비소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놀라서 이미 얼어붙어버린 나한테, 조금만 더 가면 IC가 나오고 천천히 가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친절하게 안심을 시켜주고는 그 신사가 떠나갔다.

나는 덜덜 떨면서 고속도로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정비소에 갔더니 타이어가 다 닳아서 속 타이어가 삐져나온 상태로 잘못하면 폭파할 수도 있었던 지극히 위험한 상태였다고 했다. 차 정비소만 믿고 우두커니 있다가 당한 일이었지만, 고속도로처럼 숨 가쁘게 움직여가는 장소에서조차도 남의 일에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땡중이라고 놀렸던 그 동창이 “예불시간마다 너를 위해서 기도해줄게” 라고 말했을 때 웃고 넘겼지만 그 일 이후로는 정말 영험한 기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이후로는 시주 한번 못했지만 말이다.

-계속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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