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 행사장에서..포즈 취하며 잠시 찰칵.

사건, 사고가 유난히 많았던 2005년. 이 한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 모레면 곧 2006년이 밝아온다. 추워서 일까 아니면 주머니사정 때문인지. 북적거려야할 유흥가 근처나 거리에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그 이름 한동현.

동현군과의 만남은 3년전으로 거술러 올라간다.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이때를 맞춰 한주 일찍 혜화동 대학로에서 행사가 있었다. 필자가 절단 장애인이라는 것은 다 아실터.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데, 한국재활복지대학 의료보장구학과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나왔다. 유난히 피부도 곱고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한 남자 자원봉사 학생이 눈에 띠었지만, 워낙 정신이 없던터라 그냥 그렇게 이름도 물어보지 못한 채 지나갔다.

그후, 1년이 흘러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사를 또 하게 되었다. 역시 이번에도 의료보장구학과 학생들이 왔다. 알다시피 행사 한번 치르려면 자질구레한 일들과 물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일까 한번 함께 일했다는 생각에 학생들에게 편안하게 일을 시켰다.

그때, 한 학생이 필자에게로 조용히 와서 “저...왜...동현이 한테 무거운 일을 많이 시키세요. 힘들텐데, 제가 할 테니까 가벼운 것 시켜주세요.”

헉..그말을 듣는 순간 “키도 크고 힘도 무지 쎄 보이던데..뭐가 힘들어, 오히려 말하는 학생이 더 힘들어서 못할 것 같은 데,”그리곤..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저녁 늦게서야 행사가 끝나고 물품정리까지 말끔히 해놓고 학생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았다. 뭘까...

전화를 했다. 아까 필자에게 말을 했던 그 학생에게.“저기...아까 나에게 한말..그 말뜻을 잘 모르겠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동현이라는 학생 어디 아퍼, 무거운거 들면 안되는 거야?”

“저...모르셨어요. 동현이는 양쪽다리에 의족을 착용한 절단장애인이예요. 그래서 웬만하면...”

헉, 놀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많이. 필자도 의족을 착용한 절단장애인인데 왜 그걸 몰랐을까. “에이구, 이 맹추, 이 무딘 사람아.”

서울 보훈 병원 보장구실 팀들과 함께.

그후 동현학생을 보면 남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정말 우연하게 동현학생에게서 동현이가 장애를 갖게된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동현군이 어렸을 때 동현군의 아버지는 오토바이 대리점을 했었는데, 잘못되서 그만 문을 닫고 말았다. 그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고, 동현군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가 되어 술만 먹고 집에만 들어오면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동현학생이 세 살때 아버지가 연탄난로를 들고 들어와 “동현아, 우리 여기 이 사랑방에서 같이 죽자. 그냥 편하게 함께 잠을 자면 되는 거야.”

“ 응, 아빠 이렇게 자면 되는 거지”

‘죽음’이 뭔지 모르는 동현학생은 그저 아버지가 그러자고 하는 말에 사랑하니까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방이 너무 뜨겁고 갑갑해서 눈을 떠보니 아버지는 온데 간데 없고, 방에는 불이 붙었다. 두 다리에도 불이 붙었다. 그리곤 기절했다.

깨어보니 병원. 그때 당시만 해도 동현학생이 살던 곳은 시골 깡촌이어서, 정형외과 자체도 정형외과 전문의사도 없었다. 그래서 응급처치만 하고 1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 왔다. 다리는 붙어 있었지만 기능은 없고, 기어다니지도 못했다.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건 사고후 1년. 기다가 어떻게 된 것인지 엎어지면서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다가 감각이 어느정도 돌아왔다. 그렇게 1주일만의 병원치료 후 줄곳 12살까지 초등학교도 안 다니고 집에만 방치되었다.

워낙 책을 보기 좋아하던 동현학생은 5살 때 글을 깨우치고, 남들 초등학교 다닐 때 집에서 혼자 할아버지가 사다준 동화책과 위인전을 읽거나, tv 시청 아니면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친구와 함께. 잘생겼죠.

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없을까. 그때 사고 당시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하는 생각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칼을 들고 방에 들어와 같이 죽자고 행패를 부렸는데, 그때 예전 생각까지 떠올라 아버지가 싫어지고 미워졌다. 이런 일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자주 있었기에 아버지가 휘두른 칼에 벤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큰 아버지와 고모들이 와서 말려 주곤했다.

13살 되던 해. 아버지의 행패를 보다 못한 마을에 사시는 한분이 제주도의 한 주간보호 장애인센타로 전화를 해서 사회복지사가 집으로 찾아오면서 함께 제주도로 가서 바깥활동을 처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홍익재활원(지금은 풀잎마을)이라는 곳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주는 것이 있었는데, 제주도까지 와서 모습을 보고는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 경남으로 와 초겨울에 수술을 했다.

절단 수술과 2번의 피부이식 수술을 더하고 1년 반만에 퇴원을 해 14살되던 해 청광학교(청각장애인들과 지체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초등학교 입학을 한 후 19실까지 다녔다. 그 이유는 일반학교에 다니면 거의 유급될 정도로 7차례에 걸친 수술과 치료가 반복되었기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살 초등학교 졸업을 하면서 바로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을 하고, 그 다음해 20살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바로 그해 수능을 보고 한국 재활복지대학 의료보장구학과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한 학기를 다니다가 휴학을 했다.

이유는 “처음엔 내 자신이 의족 장애인이라서 의수의족을 만드는 공부를 하면 재미있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는 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보니 나한데 이 보장구학과가 맞기는 하는 걸까” 하는 고민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휴학 후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른 길을 찾고 있는데, 그가 사는 동네에 4살짜리 꼬마 아이가 이사를 왔다. 그 아이는 선천성무형성으로 다리가 없어 절단 수술 후 의족를 착용했다. 그러데 의족이 잘 안맞는 지 그를 보고“ 형, 아퍼” 하고 우는데, 그 모습에 “아이들에게 맞는 의족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과 이 아이에게도 맞는 의족을 내손으로 꼭 만들어서 선물해 줘야지 하는 생각에 다시 1학년부터 다니게 되었다.

2년전. 그렇게 미워하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지만, 돌아가셔서 한번도 내가 아버지에게 화 한번 못 냈는데, 가버리시니까, 맺힌 한을 어디다 풀 때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아버지더라. 있을 때 마냥 미웠는데, 막상 없으니까 미워할 대상이 없으니까 그리움이라기보다 허전함이 든다”고 말한다.

물론 자살도 많이 생각했었다. 7~8번. 어린시절은 개구쟁이 였는데 장애를 입고나서 아무 것도 못하니까 링거줄에 목을 조르기도 하고, 벽에다 최대한 몸을 실어서 머리를 박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커서는 사춘기가 되면서 친구들에게 집단 따돌림도 당하다보니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17살은 운이 좋은 때였다. 체육선생님이 운동하면 잘 할것 같다는 말에 2달 연습을 하고 휠체어달리기에 나가서 당당히 금메달을 땄다. 그 후로 투포환도 해보고 투창도 했다. 그때부터 인생이 조금씩 바뀌었다. 주위에서는 운동 선수가 되어 보라고 국가대표가 되어 보라고 권유도 했지만, 운동보다는 그림이나 음악이 좋고 연극 보는 것이 좋아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매년 장애인체육대회가 열리면 투포환 선수로 나간다.

동현군은 긴 시간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피곤한 기색 한번 안 보였지만, 중간중간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면 옛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인지..목소리 톤이 올라갈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동현군은 “저의 장애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저만이 가진 신체 특징입니다. 안됐다, 불쌍하다 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는 전혀 불쌍한 사람이 아니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남 도움없이도 다 할 수 있구요, 그리고 저는 제가 불쌍하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장애인은 도움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하는데, 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제일 화가 납니다”라고 말한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동현군의 꿈은 예쁜 여자친구를 빨리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좋은 가정을 빨리 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요. 돈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꺼예요. 그리고 저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저의 기술을 열심을 배우고 다듬어서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될꺼예요."

지금도 동현군은 어느 할인마켓에서 열심히 학업과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도전하며 살아간다.

사람 만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김진희씨는 지난 97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사고를 당하기전 280명의 원생을 둔 미술학원 원장이기도 했던 필자는 이제 영세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에게 재활보조기구나 의료기를 무료로 보급하고 있으며 장애인생활시설에 자원봉사로 또 '지구촌나눔운동'의 홍보이사로 훨씬 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방송작가로 또 KBS 제3라디오에 패널로 직접 출연해 장애인계에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음식을 아주 재미있고 맛있게 요리를 할 줄 아는 방년 36살 처녀인 그녀는 장애인 재활보조기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이트 deco를 운영하고 있다. ■ deco 홈페이지 http://www.uk-or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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