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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소나기

백발마녀전(32)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5-09-30 15:35:21
예전에는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전투에 필요한 지식·기술 등을 학생에게 가르치는 군사 훈련으로서 투철한 반공의식에 바탕을 두고 유지되어왔던 유신독재체제에 걸맞은 교과목이었다. 한 학기에 한 번씩이었던가 교련 검열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납되지 않는 사열, 용맹스러운 구호, 재빠르고 정확한 응급처치 등 요즘 북한 관련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훈련의 과정이 있어야만 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노라면 하루에도 몇명씩 쓰러지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교련선생들은 그런 학생들의 허약한 정신력을 탓하며 정신무장을 한층 더 강화하라고 요구하였다. 검열에 통과하지 못하거나 낮은 점수가 나올 경우에 학교로서는 대단한 불명예를 안게 되기 때문이었다.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빈 교실을 지키고 있던 내게 그 여름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갑자기 이과반의 수학선생님이 교실에 들이닥치더니 내게 왜 운동장에 나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꾀병 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기강이 흐트러지는 걸 염려한 선생님들로 인해 가끔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장애가 있어서 여태까지 늘 그러했다는 내 답변에 그 선생님은 어이가 없어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은 뙤약볕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어떻게 혼자 교실에서 편히 지낼 수 있느냐며 당장 운동장으로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운동장으로 나간다고 해서 친구들의 고생을 덜어줄 리 만무하건만 선생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장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스탠드에는 나말고도 그렇게 불려나온 아이들이 꽤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치 죄인처럼 선생님의 일장 훈계를 들어야 했다. 너희들은 양심도 없는 아이들이다, 친구들은 저렇게 힘들게 훈련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아프다는 핑계로 교실에 남아 있으면 다냐, 아픈 게 뭐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정신상태가 틀려먹었다, 그런 정신상태로 이 험한 세상 어찌 살려 하느냐, 너희들은 쓰레기같은 인간들이다... 요지는 이러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졸지에 내 인격은 쓰레기 같은 인간, 기생충 같은 존재로 격하되어 바닥에 짓이겨졌다. 그 순간, 선생님의 얼굴이 영화에서 본 나치 대장의 얼굴로 오버랩되면서 나는 욕지기가 나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무엇이 저 선생님을 저렇게 악에 받치게 만들었을까?’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점점 강도가 세지는 선생님의 훈계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 말짱했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교련 훈련을 받던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고, 스탠드에 앉아 있던 죄인(?)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뭘 잘했다고 웅성거리는 거야? 여태까지 편하게 앉아 있었으면서 비 좀 맞는다고 대수냐? 너희들은 뛸 자격도 없는 놈들이야, 그대로 비 맞고 있어!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아이들은 서성대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러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자 선생님도 어쩔 수 없었는지 교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운동장에서 훈련을 받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뛸 수가 없었다. 두 목발을 짚은 채 뛰어봤자 소용이 없었기에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 친구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해주었다. 내가 비 맞으니까 얼른 들어가라고 해도 그애는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운동장에는 그 애와 나, 둘만 남았다. 우리는 세찬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비참하게 젖은 채 맨 마지막으로 교실에 들어갔다.

쫄딱 비를 맞고 교실로 들어가니 반 아이들이 모두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 대신 친구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던 것 같고, 아이들은 그 선생님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한마디씩들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잠깐 사이에 내게 일어난 엄청난 일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조건이라는 이유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되지가 앉았던 것이다. 나는 비에 젖은 옷을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머지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그날 내내 생각했다. 잊어버리자, 내겐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그 선생님이 이상한 거지 내겐 아무 잘못도 없다, 미친개에게 물린 셈 치자...

그 뒤론 그렇게 잊혀졌다. 한두 번 정도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며 피하곤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청춘을 살아내느라 너무 힘에 겨워 과거를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던 탓인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때 그 일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수술을 하고 통증과 싸우며 밤을 꼴딱 새던 중 갑자기 그때 그 일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그 수학선생님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가슴까지 깁스를 한 상태가 아니라면 아마 그 선생님을 찾아가고도 남을 만큼 구체적이고도 격렬한 증오심에 나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년이나 지난 일인데, 내게 이토록 미운 감정이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도 선생님에 대한 미운 감정은 결코 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아, 그래서 폭력은 오래, 깊이 간직되면서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이구나,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나는 한동안 그 선생님을 향한 내 안의 미운 감정들과 싸워야 했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폭압적인 시대를 견디느라 힘들었던 세월이기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며, 그때 난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만 치부해버리기엔 내 안의 증오심이 너무 컸던 까닭이다. 그 이전은 물론 그 후로도 그와 비슷한 정도의 감정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때의 그 감정은 강렬했다. 그때 그 선생님은 알고 계실까? 어떤 동기에서든 자신이 무차별하게 저지른 폭력으로 인해 한 영혼에 깊은 상흔을 남겼음을...

칼럼니스트 김효진 (a84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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