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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풍경

백발마녀전(31)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5-09-20 10:41:23
우리집 명절은 언제나 떠들썩했었다. 작은집 식구들이 명절 하루 전에 도착해서는 남자들도 포함해서 밤새 빙 둘러앉아 만두와 송편을 빚었고, 마당 한가운데에서는 할머니가 고소한 기름내를 풍기며 전이며 부침개를 부쳤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들락거리며 일을 거들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그야말로 총감독이었다. 모든 결정은 엄마의 권한이었기에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끼리는 삼삼오오 어울려 신나게 뛰어놀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하나씩 얻어먹다가는 끝내 졸음을 못이기고 한귀퉁이에서 쓰러져 자곤 했다. 나는 명절 때마다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떠들썩한 분위기가 좋았다. 평상시와는 달리 역동적이고 활기찼기에 심심하거나 무료할 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였던가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우리집 명절 풍경은 더 이상 풍요롭지도 화기애애하지도 않아졌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작은엄마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이 했던 역할은 고스란히 네 자매들의 몫이 되었다. 엄마는 예전처럼 결정 권한을 가지고 떠들썩한 명절을 보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 상당히 컸지만 재료만 준비해주고(예전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제수거리였다) 딸들에게 음식을 만들게 하는 방식으로 구겨진 맏며느리로서의 자존심을 간신히 지켜나갔다. 하지만 도도한 맏며느리였던 엄마의 눈에 딸들이 준비하는 음식이 마음에 들 리 만무였다. 그런 이유로 엄마는 명절 때마다 딸들을 야단쳤는데, 명분이야 늘 ‘그런 식으로 해서 어디 시집가서 살림이나 제대로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아무개의 야무진 살림솜씨와 늘 비교까지 당하였으니 우리집 네 자매들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별로 아름답지 못하게 바뀌어버린 명절을 몇 해 정도 보내고 나자 언니들은 명절 전에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넷째 딸인 여동생은 원래 잔심부름 담당이었기에 명절 음식은 자연스럽게 행동반경이 넓지 못했던 내 차지가 되었다. 명절 음식이래야 전 조금 부치고 송편이나 만두 빚기 같이 초보자도 가능한 요리였지만,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런 요리가 얼마나 인내심을 요하는 일인지... 최소한 반나절은 꼬박 같은 자세로(나는 주로 전기프라이팬이나 부르스타 등을 이용해 앉아서 했다) 일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처음엔 호기심 때문에 한번 해보겠다고 자청했던 나는 명절 때마다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장애가 있어도 이런 일은 시키지 않으련만...’ ‘나보고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하면서 왜 이런 일은 하라고 하는 거야? 어차피 나중에 해야 하는 일도 아닌데...’ 겉으로는 표현 못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불만이 쌓여갔다.

명절 준비가 끝나고 막상 명절날이 되면 그때부터는 사태가 달라졌다. 나는 명절 음식을 먹고 과일이나 깎으면 되었지만, 언니들은 하루에 최소한 10번 정도는 설거지를 해야 했다 (물론 이것도 언니들과 여동생 시집간 뒤로는 내 몫이 되었지만). 그리고 엄마는 작은집 식구들이나 친척들에게 내가 만든 음식을 내놓으며 나를 마구 추켜주었다.

“이 송편, 우리 효진이가 만든 거야! 예쁘지?”
“튀각 튀기는 건 우리 얘만큼 잘하는 사람 없을 걸!”

나는 엄마의 다소 과장된 칭찬에 몸둘 바를 몰랐지만 전날의 피로가 풀릴 만큼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엄마는 늘 친척들을 포함해 주변사람들이 나를 쓸모없는 아이로 여기고 무시할까봐 내 단점보다는 장점을 부각시켰는데, 명절 음식 만들기는 내 장점을 부각시키기에 좋은 소재였다. 엄마의 그런 전략(?) 덕분에 친척들은 내게 장기가 아주 많고 나중에 썩 훌륭한 사람은 못되더라도(그들 모두 장애인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의 장벽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듯하다. 엄마의 깊은 속도 모르고 나는 불평만 했었으니...

나중에 장애여성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로서 ‘기대치 없음’ ‘역할 없음’이 중요한 키워드임을 알게 되고 나서야 나는 엄마의 전략이 탁월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장애여성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와 많은 부분 닮아 있기도 하지만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나는 섣부른 여성의식으로 인해 명절 때 뼈빠지게(?) 일하는 것이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엄마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역할없음’으로 인해 숨겨진 존재로 성장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판단할 일은 아닌 듯싶다. 그렇게 명절 때 술마시고 고스톱치는 남자들 뒷바라지하느라 허리가 휘는 대한민국의 대다수 여성들의 문제와 그저 숨죽이고 가만히만 있으라는 요구로 인해 아무 역할도 권한도 활기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장애여성들의 문제는 달라도 한참 달라 보인다. 결국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되는 뿌리는 같으면서도 어찌 그리 다를 수 있는지...

칼럼니스트 김효진 (a84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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