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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마녀전(30)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5-09-05 15:47:25
“요즘 무슨 책 보니?”
국문과를 갓 졸업하고 첫 부임한 학교에서 고1 때 우리반 담임을 맡았던 여선생님은 내게 곧잘 묻곤 했다. 나는 그때 세계적인 명작보다는 제법 어른스런(?) 소설들을 즐겨 읽었는데, 그건 유독 조숙해서가 아니라 내게 책을 골라 읽을 선택권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도서관에는 책도 없었고, 지금처럼 도서관이 흔했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보고 싶은 책을 직접 사서 읽을 형편이 아니었기에 집안에서 굴러다니는 책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우리집에는 삼촌들이 읽었던 책들을 비롯해서 엄마가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서 사들인 책들이 꽤 많았고, 이사 때마다 우리 형제들은 그 책들을 거의 버리지 않고 열심히 싸갖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집에 있던 헤르만헷세와 헤밍웨이전집, 그리고 대망이라는 일본대하소설 등등이 내 먹잇감이 되었으며, 간간히 직장에 다니는 언니들이 사들이는 당시의 베스트셀러들도 섭렵하였다. 그때는 최인호, 박범신 등의 대중소설이 등장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그때 나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인생의 비애를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얼마전 ‘내 이름은 삼순이’라는 드라마에 나왔다는 이유로 제2의 전성시대를 맞은 “모모”라는 책도 내 여고시절에 유행했던 책 중 하나로 기억된다.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선생님이 물으실 때마다 나는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저급하다고 여길만한 책의 이름은 들먹거리지 않을 만큼의 센스는 갖고 있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이야기하면 “그 책이 이해가 되니?”라는 반응을 보이며, 내가 무척 수준이 높은 줄 알고 감탄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보면서 좀 면구스럽긴 했지만... 아무튼 선생님은 국문과에 진학해서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 희망사항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믿음을 갖고 계셨던 듯하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그 믿음을 간단히 저버리고 말았다. 고1,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자신의 진로에 맞추어 이과와 문과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언니의 충고에 따라 이과를 지망하고 말았다. 이과로 가서 실력을 쌓으면(그때 여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주로 이과로 몰렸다) 선택할 수 있는 학과가 많을 텐데 굳이 처음부터 진로를 한정할 필요가 있느냐, 사실 국문과 나오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굳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영문과도 있다. 영어만 잘하면 네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다... 라는 게 큰언니의 논리였다. 현실을 로려할 때 그 말이 지당하기도 했거니와 큰언니는 그때 아버지 대신 우리 집안을 이끌어가던 기둥이었기에 나는 그 말을 감히 거역하기가 힘들었다.

“너 이과 지망한 거 맞니? 왜? 국문과에 간다면서?”
“예, 큰언니가 영문과에 가라고 해서요. 국문과 나오면 취직 못한다고...”
그때 선생님의 실망스런 표정이라니... 허나 선생님은 좀더 생각해보자며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적성검사라는 걸 했다. 문항이 굉장히 많았다는(예나 지금이나 무슨무슨 검사에는 왜 이다지도 문항이 많은 걸까?) 기억만 어렴풋이 나는 그 적성검사에서 나는 이과 적성은 50점도 안되고 문과 적성이 월등히 높은 결과를 받았다. 선생님은 종례 때 반 아이들 전체 앞에서 내 적성검사 결과를 공개했다. 요지는, ‘이것 봐라. 이렇게 적성이 분명한데, 현실에 굴복해 자신의 적성과는 무관한 진로를 택하겠다는 게 옳으냐? 꿈을 펼쳐야 될 너희들이 영악한 계산만 앞세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적성검사 결과를 놓고 ‘역시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졸지에 계산에 영악한 아이로 몰리다니 좀 억울했다. 큰언니의 충고는 장애가 있는 동생이 미래에 많은 제약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배려한 것이었고, 나 역시 그런 점을 고려해서 그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일 뿐인데... 그래서인지 선생님 역시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배려로 느껴지기보다 상당한 억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나는 적성검사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문과로 가게 되었다. 그 뒤 문과에서 배우는 수학1만으로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면 이과로 가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며, 고1 때 담임선생님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다소 억압적으로 느껴지긴 했어도 선생님의 충고를 따라 내가 원하는 바대로 진로를 정할 수 있었기에 나는 그 뒤 내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 있었다고 본다.

훗날 큰언니의 충고는 적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국문학을 전공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기에 나는 내 인생의 활로를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만약 언니들과 부모님의 뜻대로 결정하고 선택했다 해도 내 결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힘이 과연 나왔을까?

칼럼니스트 김효진 (a84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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