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하순인데도 비가 장마비처럼 길게, 그리고 자주 내린다.

비가 그치고 나면 쪽빛 하늘 아래 가을햇살이 따갑게 내릴 것을 생각하니, 그 햇살로 복잡 다난하게 지나온 여름의 흔적들을 비춰보기도 하고, 이리 저리 부딪치며 구겨진 일상의 편린(片鱗)들을 다림질하여 곱게 펴서 접어두고 싶다.

그리 아귀다툼으로 산 것도 아닌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 먹은 바람에도 마음 싸해지면서 하잘 것 없는 미물(微物)에게도 제 소임(所任)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애틋해졌다.

올 가을에도 늘 입고 다니는 옷처럼 편안한 사람, 늘 안온(安溫)한 얼굴을 가진 사람,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 같은 생각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들이 안부를 전해올 것이다. 그리고 신실 (信實)함과 감사함이 묻어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여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십시일반으로 정성어린 후원금으로 보내주는 후원회원들은 탄탄한 반석과 질 좋은 나무가 되어 주어 뇌성마비인들의 재활의 터전을 만드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휘황찬란(輝煌燦爛)하게 스포트라이트를 터트려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따뜻한 찬사(讚辭)를 보내고 싶은 분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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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 되면 후원을 시작한지 10년째 되시는 후원회원님께 뇌성마비장애인들이 직접 만든 칠보, 도자기 등의 소품을 액자에 넣어 보내드리고 있다.

오늘 아침 10년 후원회원들의 명단을 살펴보니 아는 이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 이름들 사이에서도 더욱 반가운 이름이 고교시절 담임을 하셨던 "한승희"선생님과 방송인 임백천씨였다.

수선화를 닮은 한승희 선생님은 어머니같으신 분이다. 학부모 상담을 하러온 어머니를 교문 앞까지 배웅을 나오신 선생님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하시며 눈물을 보이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날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시던 선생님의 손길을 돌아가시는 날까지 못 잊어 하였으며 그 제자사랑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생님께 가끔 안부인사 전화를 드리면 "애야 시집가야지. 아직도 애인 없니?" 라고 하신다. 그 말은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것과 같이 다정하게 들린다.

방송인 임백천씨는 10년 동안 후원회비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보내고, 작은 선행이라도 겉으로 내보이고 싶어하는 세태 속에서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더욱 빛나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몇 년 전 후원담당자가 우편물이 반송이 되어 전화 통화를 하였는데 엉뚱한 우편물이 많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정중하면서도 친절하게 받아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두 분뿐만이 아니라 다른 후원회원들도 10년을 하루같이 후원을 계속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분들의 정성은 들판의 곡식을 여물게 하는 가을 햇살처럼 뇌성마비인들의 생활 곳곳에 미치고 있다.

올 여름에도 오뚜기글방에서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과정을 마치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들어간 뇌성마비학생 둘이 인사를 왔다갔다. 그들의 그런 성장은 뇌성마비장애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여 얻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후원회원들의 정성은 우리 뇌성마비장애인이 멀고 험한 산을 오를 때 간간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뇌성마비인들이 만든 정성 들여 액자를 받은 많은 분들이 잠시나마 보람을 느끼게 되고, 후미진 곳 한 구석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모두에게 후원과 격려가 계속적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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