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밤늦게 돌아오시던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런지 어머니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드십니다. 안방 불이 꺼지자 지영이는 살짝 방문을 열고 댓돌에 나가 앉아 대야 안을 들여다봅니다. 아까는 죽은 듯 바닥에 엎드려 있던 자라가 물위에 떠 있습니다.

‘아무도 없으니까 물위로 올라왔네. 동그란 게 귀엽게 생겼다.’

자라를 보면서 지영이는 아까 낮에 숙이네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자라 생피를 마시면 다리가 금방 낫는대요.’

다리가 나으면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맞아! 걷게 되면 나도 소풍을 갈 수 있을 거야. 지영이는 꽃이 가득 핀 들판에서 친구들과 뛰어 노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놀이동산. 늘 가보고 싶던 그곳에서 친구들이랑 놀이기구도 탑니다. 하지만 그런 놀이 보다 훨씬 더 간절한 일이 무엇인지 지영이는 잘 압니다.

그‧녀‧석‧들!

지영이는 제일 먼저 학교로 달려가서 그 아이들 앞에 짠!하고 나타나고 싶습니다. 그러면 녀석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는 나를 보며 ‘병신!’이라며 놀려대지 못하겠지! 함부로 돌을 던지지도 않을 거야. 그러면 내가 쫓아가서 혼쭐을 내줄 테니까. 생각만 해도 신이 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학교 가는 일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울까요?

그러다 지영이 눈길이 자기도 모르게 자라에 가 닿습니다. 살짝 살짝 헤엄을 치고 있는 동그랗고 귀여운 녀석. 자라를 보니 다시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이 자라도 엄마랑 가족들이 있을 거야. 어쩌면 자라 엄마는 지금쯤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걱정하면서 찾아다니는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 이번엔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 나 때문에 자라를 죽일 수는 없어!’

지영이는 잘 걷지 못해 힘든데 놀림까지 받는 게 몹시 서럽고 속상하지만 그렇다고 자라를 죽이면서까지 뛰어 다니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라가 죽으면 자라네 엄마와 가족들은 얼마나 슬프고 불행하게 살아갈까요? 생각만 해도 찔끔 눈물이 납니다.

쉬지 않고 내리는 장맛비는 지영이 방 처마 끝으로 몰려 꼭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쏟아진 빗물은 지영이네 마당 수돗가에 있는 하수구로 세차게 흘러듭니다. 지영이네 하수구는 구멍이 너무 커서, 어머니는 늘 구멍을 반만 열어놓으십니다. 개구쟁이 동생들이 발이라도 빠트릴까, 걱정 되셨던 거지요. 하지만 오늘은 하수도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올 때 구멍을 반만 열어 놓았다가 자칫 하수도가 막히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지영이는 자라가 들어있는 대야 한쪽을 힘껏 들어 올립니다. 대야가 기우뚱, 하더니 안에 든 물이 쏟아집니다. 시커먼 자라가 쏟아진 물과 함께 주르륵 수돗가로 미끄러져 가는 것이 보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저 아래 개울까지 금세 다다를 수 있을 거야.’

지영이는 하수도 쪽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자라에게 손을 흔들어 줍니다.

‘잘 가, 자라야. 다시는 사람들 손에 잡히지 마라.’

그렇지만 혹시 자라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 길을 잃고 헤맬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를 놀린 아이들, 다 용서해 줄게요. 학교가 싫단 생각도 안하고 열심히 다닐게요. 제발 자라가 자기 집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불 꺼진 안방엔 방문이 반쯤 열려 있습니다. 덥고 습기 찬 날이어서 공기가 통하도록 열어 두신 거지요. 그 열린 문틈 사이로 어머니가 지영이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영이와 함께 두 손 모으고 기도를 하십니다. 자라가 엄마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또 지영이가 더 이상 놀림거리가 되지 않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지요.

* * * * *

“왜 그러셨어요, 아줌마! 자라 피 먹고 다리 나아서 뛰어다니면 좋잖아요? 그 녀석들을 혼내 줄 수도 있는데!”

정원이 엄마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경철이가 벌떡 일어서며 흥분했다. 정원이도 뭔가 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엄마를 괴롭히던 녀석들을 혼내주었더라면 속이 다 시원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아줌마, 자라 피 먹으면 아줌마 다리가 낫는다는 거, 진짜로 정말이에요?”

경철이가 궁금한 듯 묻자 엄마는 목발을 짚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때 아줌만 정말이라고 믿었다. 믿었지만 내가 뛰어다니기 위해 자라를 죽이는 건 원치 않았어.”

“왜요?”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렴. 그리고 너라면 어떻게 할지, 그것도 한번 생각해보고.”

엄마는 정원이한테, 경철이 도와서 메추라기 묻어주고 들어오라고 하고는 1, 2호 라인 현관으로 먼저 들어갔다.

“우와~~, 아줌마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내가 뭔가 큰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정원의 팔꿈치가 경철이 가슴팍을 강타했다.

“어린 새를 죽인 건 당연히 큰 죄지! 누가 네 목숨 갖고 장난치면 넌 좋겠냐?”

경철이는 얻어맞은 가슴팍보다 목숨이 더 걱정되는지, 자기 목을 얼른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쓰러지는 시늉을 냈다.

“으윽, 내 목숨!”

* * * * *

다음 날 오후, 아버지와 텔레비전을 보던 정원이가 무심코 어제 있었던 일을 아버지한테 말했다. 만화가인 아버지는 원고를 막 출판사에 넘긴 터라 모처럼 한가해서 그런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정원이 얘기를 끝까지 들었다.

“흐음…, 엄마가 그런 얘길 하셨단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엄마 말씀을 듣고 저도 많이 반성했어요. 나쁜 친구들한테 놀림 당하고 머리까지 다쳤는데, 그런 녀석들을 용서하다니! 저라면 당장 자라 피를 마시고 달려가서 녀석들을 혼내줬을 텐데! 엄마는, 자라를 죽이느니 차라리 엄마가 고통을 참고 사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경철이도 엄마 얘기를 듣고 나서는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아무 때나 장난만 치던 녀석이…”

정원이가 말하는 중에 아버지는 벌떡 일어서더니 주섬주섬 겉옷을 찾아들었다.

“정원아, 아빠랑 민속 장 서는데 안 갈래?”

“난데없이 웬 민속장이요?”

정원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묻자 아버지는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자라 사러.”

정원이는 아버지가 자기 말을, 아니, 엄마가 한 이야기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놀라서 펄쩍 뛰며 아버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나 봐! 엄마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다, 알아. 그때는 엄마가 어렸으니까 한 마리면 됐지만 지금은 다섯 마리? 아니, 열 마리면 충분할까?”

“아빤 아무래도 사오정 띠인가 봐!”

점점 높아지는 정원이 목소리와 “하하, 농담이다, 농담!”하는 아버지 웃음소리가 한가한 오후, 집안을 가득 채웠다.

<작은 세상>의 작가 최현숙은 첫돌 지나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을 졸업하며 시를 접었다가 2002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2005년 구상솟대문학상 본상(시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동화작가·콘티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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