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도 그렇고 9월도 그렇고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방학 내내 집에서 빈둥대던 나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신학기 때는 겨우내 칩거하다가 아무 예열 과정 없이 꽤 타이트하게 진행되는 학교 일정에 따르느라 더욱 힘들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교실은 또 왜 그리 추운지... 특히나 반 친구들이 모두 운동장에서 나가서 조회를 하거나 체육 혹은 교련을 할 때 빈 교실에 남아 있으려면 그야말로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뎌야 했다. 콘트리트 건물이라 추웠을 테지만, 낯선 친구들과 아직은 서먹한 관계로 인해 외로워서 더욱 추웠던 듯하다. 아무리 에너지절약도 좋지만 여학생들을 그렇게 추운 곳에 방치할 수 있다니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에너지절약은 핑계였고, 경비절감이 더 큰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내가 다녔던 사립학교는 신생학교라 그런지 지나칠 정도로 학생들에게 궁핍한 생활을 강요했었다.

어쨌든 학기가 시작되면 한달 정도는 겨우 버틸 수가 있었는데, 한 달 정도가 지나고 서서히 적응이 되어 갈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감기몸살이 찾아왔다. 하지만 고열과 기침이 심해져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어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엄마가 곁에서 참 정성스럽게 보살펴주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평소 자신에게는 물론 아이들에게 엄격한 분이었기에 그다지 다정다감한 편이 아닌데, 아픈 아이에게는 굉장히 너그러웠고 따뜻했다. 자신이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그런지 내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는 내 증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아픈 증세를 호소할 때마다 자신의 허약한 점을 닮아 그렇다고 여기고 마음아파했다.

“원, 몹쓸 건 닮아가지고...”

너무 많이 아플 때는 어떻게 설명할 수조차 없고 말하기도 싫으면서 앓는 소리만 저절로 튀어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 상태를 잘 헤아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 엄마처럼 내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그게 어느 정도 아프다는 소리인지 잘 헤아려주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머리가 아프면 어떤지, 후두가 부으면 어떻게 쑤시고 아픈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리고 이해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알게 되었다.

밤새 고열로 잠을 못자도 엄마는 언제나 뜬눈으로 내 곁을 지켜주었다. 밤은 언제나 너무 길었고 언제 열이 떨어져 잠시라도 꿀같은 잠을 잘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어도 그때마다 내 곁을 지켜주는 엄마로 인해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 밥을 먹지 못하면 죽을 쑤어 주고 입맛 당기는 과일을 권하던 엄마의 손길은 또 얼마나 따뜻했는지...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그렇게 아픈데 학교 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라.” 하시던 엄마의 음성은 얼마나 다정했는지... 그렇게 심하게 아프고 나면 몸은 날아갈 듯이 가볍게 느껴졌고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나도 모르게 힘이 솟곤 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무척 강한 사람, 건강한 사람으로 비쳐진다고들 한다. 남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아마도 언제나 내게 위로와 휴식이 되어주었던 집, 그곳에서 언제나 내 엄마가 한없이 약해진 나를 보듬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내 약한 구석을 어루만지며 견디기 힘들 만큼 힘들어질 때마다 숨통 틔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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