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막바지에 들어선 것 같다. 올 장마는 용두사미가 될 거라고 하였던 일기예보가 적중하는 것도 같다.

사람의 마음이 심란한 것 중에서도 가장 심란한 것이 날이 어두워질 때 집안으로 물이 들 때란 옛말이 있다. 직접 겪지 않고 말만 들어도 정말 심란 것이 장마철의 물난리소식이다.

이제 장마가 뒷모습을 보이려고 하고 있으니 올해는 별 피해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은 아버지가 들려주신 장마비이야기, 더 자세히 말하면 장마 중에 살아남은 호박넝쿨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990년대 초에 삼일동안 500밀리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져서 중랑천이 넘치고, 주변의 집들이 잠기는 물난리를 겪은 적이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이 지역 주민들이 저마다 중랑천 뚝 밑에 조금씩 구역을 정하여 호박이며 고추, 아욱 같은 채소를 심기도 하였다. 그 시절만 해도 중랑천이 정비되지 않아 채소를 재배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큰비가 매년 많이 내리는 것은 아니어서 해마다 여름 반찬거리를 할 정도의 수확을 얻을 수는 있었다. 시장에 나가 돈만 내면 금방 살 수 있는 채소였지만 손수 씨를 뿌리고 그것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 해 집중호우가 쏟아지던 날, 아버지도 쏟아지는 비가 걱정되어 이웃어른과 함께 중랑천 둑에 나가셨는데 평소엔 그리 많지 않던 중랑천에 말 그대로 물밀듯이 밀려드는 물이 걱정스럽고 무섭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중랑천의 물이 무섭게 불어난 것은 물론, 지대가 낮은 집들은 방에까지 물이 들어 그야말로 물난리에 한숨이 저절로 나오시더란 것이다.

장맛비도, 홍수도 자연현상이고 중랑천 둑을 무너뜨릴 듯 기세도 등등하던 그곳에서 아버지는 작은 자연의 큰 힘을 보셨다고 한다.

그건 바로 동네 주민들이 중랑천 뚝 언저리에 심어놓은 호박넝쿨이었다. 어린아이의 머리 만한 호박이 달린 호박넝쿨이 둑의 언저리에 물이 치오르자 마치 물위 뜬 고무공같이 흐르는 수면 위로 둥둥 떠올라, 거세게 흘러가는 물결을 용케도 피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결에 떠밀려온 호박이었다면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아래로 떠내려갔어야 당연 일이었겠지만 그 호박넝쿨은 아버지가 집으로 발길을 돌릴 때까지 그 자리에 떠있었으니 그곳에 뿌리를 내린 호박넝쿨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둑 밑으로 내려가 물 속의 줄기를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단단히 묶어놓은 지형지물이 물살을 못 이겨 떠내려가고 둑이 무너지려고 하는데 호박넝쿨이 떠내려가지 않고 건재하게 서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걷잡을 수 없는 거센 물살에 이리 저리 흔들리며 자신을 지켜낸 것이다. 이미 지난 봄에 호박은 자신을 키우면서 닥쳐올 홍수를 그렇게 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호박뿐만 아니라 들꽃들도 닥쳐올 재난을 준비하며 자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사무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중랑천을 바라 볼 때가 있다.

잘 정비된 중랑천 변에는 지금도 들꽃과 채소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 드문드문 눈에 뜨인다

몇 해 동안 우리 사회는 홍수에 버금가는 재난과 재해, 경제위기, 외환위기, 등등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나하나 따질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 재난과 재해에 대책과 방비가 부족했고, 어찌 보면 모든 것에서 개천 둑에 자라는 호박넝쿨만도 못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최근 모 방송의 시사 프로에서 방송한 보기에도 민망한 사회복지관련 기관의 소식들은 호박넝쿨을 생각나게 하였다. 아마도 그 소식들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에 겉만 화려한 거짓 꽃들을 피우고, 결실의 자리에 터무니없고 실속 없는 열매들만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랑천 언저리에 뿌리내리고 살던 호박넝쿨보다도 못한 우리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장마비가 끝나기 전에 한번쯤 현재 일하고 있는 내 자신은 어떠한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은 어떠한가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자.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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