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는 다섯 살 때 이미 다른 아이들보다 표정이 풍부했고 말을 할 때면 늘 몸짓‧손짓을 섞어 썼다. 선생님들은 정현이가 무슨 말이든지 온몸으로 표현한다면서 칭찬을 했고 유아원 친구들 역시 그런 정현이를 샘내거나 잘난 척 한다고 따돌려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입학 후 처음 한 달 동안 학부모 참관 수업에 들어 왔던 엄마들이, 정현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며 한 동안 수군거린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학부모인가 ‘아마 연기학원을 다녔나 보다’하는 바람에 다들 부러워하며 끝난 작은 사건이 있었을 뿐이다.

그때와 지금 아이들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에 정원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너희들이 입학하고 한달 정도 지났을 무렵, 원장 선생님께서 정현이 어머니와 나를 따로 부르시더라. 여느 때와 달리 장애인인 학부모가 둘이나 되니 걱정이 되셨는지,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하셨지. 나도 그때 정현이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처음 알았단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이 정현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배우셨다면서 서툴게나마 수화를 하시는 걸 보고 어찌나 감동을 받았던지!”

“알아, 엄마의 ‘존경하는 스승’ 목록 여섯 번째 줄 오른쪽.”

“그래. 엄마 스승님과 네 선생님을 합쳐서 거기에 오르신 분이 아직은 몇 분 안 되지만 우린 더 많은 선생님들께 기회를 줘야해. 그러니 내가 너희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그러자 정원이가 화들짝 놀라며 엄마 앞을 가로 막고 섰다.

“엄만 내가 고자쟁이로 왕따 당했으면 좋겠어?”

“네가 왜 고자쟁이야? 엄마가 고자질한거지. 네 엄마 푼수인 거 온 동네가 다 알잖아? 참! 정현이네 집에 청각장애인용 팩스 전화 있지? 내가 당장 정현이 어머니께 전화를….”

“소용없다니까! 전화는 주로 정현이가 받는데, 그런 얘기를 자기 엄마한테 전해주겠냐고!”

* * * * *

이기자 선생님은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기장 검사를 끝내고 안경을 벗었다. 내일 출근하기 위해선 얼른 잠을 자야 하지만, 하루 종일 서 있느라 딱딱하게 굳은 종아리며 두꺼운 안경 무게에 늘어진 눈언저리 피부도 걱정이 되어 일단 요가를 먼저 하기로 했다.

하지만 온 몸에 힘을 빼고 다리를 쫘악~ 벌리고 엎드려 스트레칭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우정현 생각으로 들끓어 그리 편안치가 않았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그렇지. 애 혼자 있는 집에 열한시가 넘도록 부모님 두 분이 다 안 들어오시다니.’

정현이 부모님과 얘기를 좀 나눠 보려고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계속 정현이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내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아직까지 정현이 부모님과 얘기 한번 못해 본 게 마음에 자꾸 걸렸다.

‘내일 아침자습 시간에 정현이를 따로 불러 얘기해 봐야겠다.’

이기자 선생님이 세수를 막 끝내고 얼굴에 진흙 팩을 붙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하필 이런 때! 지금 말하면 주름지는데….’

수화기를 든 선생님은 될 수 있는 한 입을 작게 벌리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요보소요(여보세요)? 오~, 종온이 오모니(아, 정원이 어머니)?”

그러던 이기자 선생님이 갑자기 얼굴에 붙인 진흙 팩을 확 잡아 뜯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우정현 부모님이요? 좀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 * * * *

다음 날, 교실에 나란히 앉은 정현이와 민희는 서먹서먹한지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은 채로 1교시를 마쳤다. 평소 그렇게 떠들어대던 김홍석과 정인영까지 떠들 기분이 나지 않는지, 쉬는 시간에도 만화책이나 뒤적거리고 있었다.

2교시는 ‘말하기 듣기’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모처럼 조용한 분위기에서 수업을 하니 몹시 기분이 좋은 듯 아이들 사이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책을 읽었다.

“자, 오늘 ‘말하기 듣기’ 시간에는 말과 소리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또 청각장애인들이 쓰는 수화 역시 일종의 말이란 것도 알았죠?”

그때 오정원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요, 선생님. 우리가 청각장애인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러자 은혜도 귱금한 듯 “맞아, 우린 수화를 못하는데.”했다.

“글로 쓰면 되잖아.”

홍석이 말에 정원이가 다시 “글을 쓸 연필도 종이도 없을 땐?”하고 물었다. 아이들의 대화를 듣던 이기자 선생님은 “좋은 질문이에요.”하며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 수화는 누구나 배워 두는 게 좋아요. 살아가다보면 언제 어디서 청각장애인과 만나 대화를 하게 될지 모르잖아? 인종과 민족을 넘어 온 지구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 글로벌 시대에 외국인이건 청각장애인이건 우선 말이 통해야 하잖니.”

“그렇지만 수화를 어디에서 배워요? 수화를 가르쳐주는 학원도 있나요?”

정원이가 또 묻자 선생님은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방금 좋은 생각이 났는데….”했다.

“그럼 우리 3학년 4반은 아침자습 시간에 한문 대신 수화를 배워 볼까?”

아이들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끼야호!”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떠든 말은 “한문 안한대, 아이 좋아.”였다. 그 다음으로 “재밌겠다.”가 쏟아졌다.

그 소란 속에서 우정현은 어째야 할지를 몰랐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수화 얘기를 하실 때만 해도, 수화 얘기가 나온 김에 자연스레 선생님께 말씀드릴까, 하고 잠깐 생각해보았지만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 그만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때 정인영이 궁금한 듯 큰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누가 수화를 가르쳐주시는데요?”

“내가 담임인데 누구한테 너희를 맡기겠니? 당연히 내가 가르치지.”

담임선생님의 능력을 다시 보았다는 듯 아이들이 “와우~ ”하며 탄성을 지르자 이기자 선생님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소리가 좀 가라앉자 교탁을 탁탁 쳤다.

“그럼 아직 수업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맛보기로 수화를 하나만 배워볼까?”

그렇게 3학년 4반의 수화 수업이 시작되었다.

* * * * *

시범으로 아이들 앞에 불려나간 정인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안녕하세요?”를 수화로 하고 있었다.

오른 손으로 왼쪽 어깨를 슬쩍 쓸고는 팔꿈치를 굽힌 상태로 아래를 향해 쥔 두 주먹을 까딱하며 “안녕하세요.”해야 하는데 인영이가 너무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내미는 바람에 아이들이 “마치 ‘너 죽을래?’하는 것 같다.”하며 배꼽을 쥐고 웃었다.

선생님은 잠시 시계를 보더니 “자, 그럼 잠깐 3학년 연구실에 다녀올 테니, 그 동안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조별로 방금 배운 수화를 연습하고 있도록.”하고 총총히 나가셨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교실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서로 주먹을 들이대며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가 하면, 수화가 너무 어렵다면서 “어떻게! 난 못하겠어.”하는 포기형도 나왔다.

오직 우정현만이 그 모든 혼란과 자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말하기 듣기 책에 얼굴을 들이밀고 열심히 읽는 척 하고 있었다. 그때 정원이가 벌떡 일어나 우정현 앞으로 갔다.

“정현아, 내가 ‘안녕하세요?’ 하는 거 좀 봐줄래?”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정원이가 물어보자 정현이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정원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수화 동작을 하며 “이거 맞니? 손을 여기까지 올리는 거 맞아?”하자 정현이도 자연스레 “아니, 손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야 해.”했다.

그러자 홍석이가 쪼르르 다가 와 놀랐다는 듯이 “오우~, 우정현! 수화할 줄도 알아?”하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러자 반 아이들이 다 정현이를 돌아보았다. 그때 정현이는 민희 얼굴에서 ‘재 또 잘난 척 한다’는 듯한 표정을 보았다. 순간 정현이는 반 아이들이 다 들을 정도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난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수화로만 말하며 자랐는걸.”

하지만 정현이 말이 무슨 뜻인지 채 이해하지 못한 홍석이는 무조건 “우와! 정현인 좋겠다, 부모님도 수화를 하실 줄 알다니.”했다. 인영이도 반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뭐? 그럼 정현이 부모님이 청각장애인?”하며 떠들어대자 이번엔 정원이가 얼른 그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맞아. 그래서 정현인 자기도 모르게 말할 때면 꼭 수화를 함께 하곤 한단다. 두 개의 말을 동시에 하는 습관이 들었나 봐.”

그제야 인영이가 놀라면서 “뭐? 정말 정현이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이시란 말이야? 그럼 네가 말할 때 하는 손짓이 잘난 척이 아니고 수화…?”하더니 미안한 듯 말을 흐렸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시작한 홍석이도 “그것도 모르고 스타병이라고 놀렸다니, 너무너무 미안하다!”며 어쩔 줄을 몰랐다.

빛나랑 민희 역시 어쩔 줄 몰라 망설이다가 쭈물쭈물 앞으로 나오더니 “미안해 정현아. 우린 정말 몰랐어.”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나오자 쑥스러워진 정현이는 “나도 고치려고 해봤는데 잘 안되네.” 하고 서둘러 변명을 했다.

그렇지만 은혜가 “고치지 마 ,정현아. 두 개의 말을 동시에 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니?”하자 다들 “맞다! 정현이 손짓‧몸짓 하나하나가 다 말하는 거잖아.”하고 맞장구를 치며 와글와글 정현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정현아. ‘안녕하세요?’ 말고 다른 것도 좀 가르쳐 줘.”

“‘미안해’는 어떻게 하니?”

“수화로 ‘왕따’도 말할 수 있어?”

* * * * *

반 아이들이 정현이와 함께 수화 연습에 정신이 팔려 있을 즈음, 이기자 선생님은 4학년 연구실에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봉사활동을 하느라 수화를 조금 배운 적이 있는 이기자 선생님은 어젯밤 정원이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자연스레 수화를 끌어들일 방법이 없을까, 의논을 했다. 그리고 아침 일찍 등교한 은혜, 정원이와 머리를 맞대고 아이들도 정현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미리 각본을 짰던 것이다.

그 각본이 일단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제부터가 걱정이었다. 오늘 하루는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 아이들을 매일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때 마침, 청각장애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는 올해 새로 오신 여영구 선생님이 떠올랐고, 도움을 청한 끝에 수화를 가르쳐주겠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여 선생님? 주먹을 이 높이로요?”

“아뇨, 몸에 너무 힘을 주지 마시라니까요. 그러면 이기자 선생님이 꼭 깡패 같아 보인다고요. 그리고 전 남자 선생이지 여선생이 아닙니다. 차라리 영구 선생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제2화 ‘우리들의 왕따’ 마침

<작은 세상>의 작가 최현숙은 첫돌 지나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을 졸업하며 시를 접었다가 2002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2005년 구상솟대문학상 본상(시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동화작가·콘티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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