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회의가 끝나자 정인영, 김홍석, 유민희는 담임선생님 앞에 불려갔다. 이기자 선생님은 말로만 듣던 왕따 사건이 자기 반에서 일어났다는데 충격을 받은 듯, 처음부터 아이들을 몰아붙였다.

"그러니까 정현이가 우리 반 왕따냐? 엉?"

"그게 아니라…."

정인영이 변명을 하려 하자 선생님은 "아니긴 뭐가 아냐? 정인영, 네가 우리 반 애들 별명 다 만든다는 거 안다. 그래, 니 별명은 뭐냐?"하며 다그쳤다. 정인영은 머리를 긁적이다 할 수 없이 "얼큰이요."하고 중얼거렸다.

"얼큰이?"

선생님은 어린 시절에, 약주를 드신 어른들이 "얼큰~하게 취한다."하시던 말이 생각나, "하필 왜 얼큰이야? 너 술 마시니?"하고 물었다. 난데없이 술 얘기가 나오자 “예? 웬 술이요?”하며 인영이는 펄쩍 뛰었고 김홍석이 얼른 나서서 "얼큰이는 ‘얼굴이 큰 아이'를 줄인 말이에요."했다.

선생님은 매사에 촐싹촐싹 나서는 홍석이가 못마땅해 "썰렁이, 넌 가만 좀 있어."하며 면박을 주었지만 홍석이는 담임선생님이 자기 별명을 안다는 사실에만 감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말해 봐. 너희들이 정현이를 따돌리는 이유 말이야."

선생님이 다시 묻자 인영이는 억울하다는 듯이 "저희는 정현이 따돌리지 않았어요. 그냥 재밌어서 장난을 좀 친 거예요”했다. 선생님은 좀처럼 말할 것 같지 않은 두 녀석과 입씨름을 하느니 이번 사건의 실마리를 만든 민희를 달래는 게 쉽다고 생각했는지, 민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민희, 네가 말해 봐. 정현이가 왜 우웩이야?"

선생님이 딱 집어 자기를 가리키자 민희는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걘, 척하는 게 너무 심해서 얄미워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척?"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선생님이 되묻자 홍석이가 또 나섰다.

"예쁜 척, 잘난 척, 그런 거요."

"여자 애들은 정현이가 '스타병'이라서 싫대요."

홍석이 말에 인영이가 거들고 나서자 민희는 이 기회에 정현이의 나쁜 버릇을 알리고 싶었는지,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정현이는 마치 자기가 스타라도 되는 것처럼 말할 땐 꼭 이러면서 잘난 척을 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싫어하는 거예요."

이기자 선생님은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 * * * *

“끌려간 녀석들, 선생님께 야단맞겠지?”

은혜네 집까지 함께 가는 길에 빛나는 내내 민희 걱정을 했다.

“우정현도 걱정이야. 애들이 우정현한테 왜 그러는 거니?”

아직도 눈치를 못 챈 은혜가 정현이를 걱정하자 빛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정원이가 정현이랑 친하다는 걸 잘 아니 흉은 보지 않았지만 빛나도 정현이가 못마땅한 게 분명했다. 정원이도 그런 빛나가 못마땅해서 놀다 가자는 걸 마다하고 은혜네 집 앞에서 그만 돌아 나왔다.

정원이 머릿속은 온통 정현이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그랬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현이네가 사는 213동 쪽으로 빙 돌아 걷고 있었다. 그런데 213동 옆 놀이터에 혼자 있는 정현이가 보였다. 시소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현아!”

정원이가 뛰어가 정현이 어깨를 툭 치고는 얼른 시소 앞자리로 가 일부러 쿵! 하고 힘을 주어 앉았다. 정현이 쪽이 불쑥 올라갔다. 정원이를 보자 정현이가 씩 웃었다. 하지만 왠지 눈 주위가 불그스레해 보여 정원이는 어째야 할지 몰라 시소만 탔다. 말없이 시소를 타던 정원이가 한참만에야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정현아, 아이들이 너한테 왜 그러는지 너도….”

“알아.”

정현이가 말 꼬리를 자르며 발을 세게 굴렀다. 이번엔 정원이가 쿵 떨어졌다.

“아이들한테 잘 설명하면 안 될까? 네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말이야.”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뜻밖의 말에 정원인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당연히 정현이가 잘못한 건 없었다. 오히려 자기네 기분에 거슬린다고 왕따를 시킨 아이들이 잘못이었다.

“네 잘못은 없지만 아이들이 자꾸 오해하니까…. 다들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말을 하면서도 정원이는 자기가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이 정현이가 발끈할 밖에.

“넌 내가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얘들아. 사실을 털어 놓을게 제발 이해해 줘.’하고 빌라는 거니?”

정현이가 빽 소리를 지르며 시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정원인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정현이는 아까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싫어. 차라리 왕따 당하는 게 더 낫겠다. 스타병이라고 아이들이 놀리건 말건 난 신경 안 써!”

잔뜩 화가 난 정현이는 온 몸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였다. 정원이는 그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었다. 정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될 뿐 아니라 화만 더 부채질한 꼴이니, 자기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 *

정현이가 가버리고 난 뒤에도 정원이는 놀이터에 혼자 남아 미끄럼도 타고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기도 하면서 정현이랑 유아원 다니던 때를 기억하려 애썼다. 둘이 늘 붙어 다니던 건 생각나지만 이렇다할 뚜렷한 사건은 떠오르지 않았다. 유아원 첫 학기를 마치자마자 정현이네가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두 아이가 다시 만난 건 바로 몇 달 전, 3학년 4반 교실에서였다. 정현이네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다시 이 동네로 온 것이라 했다. 둘 다 키가 훌쩍 커버린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님아! 여기서 뭐하셈?”

난데없이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정원이는 그만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엄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유치한 인터넷 언어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마 얼굴을 보자 정원이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까 은혜가 전화했단다. 숙제 물어볼 게 있다고. 그런데 집으로 갔다고 한 게 언젠데, 왜 여기 혼자 앉아 있니? 너 벌써 방황하는 사춘기냐?”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으면서 엄마는 힐끔 정원이 눈치를 보더니 못 참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엄마가 아까 은혜 어머니랑 수다를 좀 떨었거든? 근데 오늘 반 친구들이랑 정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서? 혹시 그 일이니? 엄마가 정현이를 처음 봤을 때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던…?”

정원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선생님께 말씀 드려야지. 아님 정현이 어머니한테 선생님을 만나 보시라고 할까?”

“안돼! 그럼 난 고자쟁이가 되잖아. 만약 엄마가 아주머니한테 일러바치면 우리 우정은 끝이라고! 정현이는 자기 일로 부모님께 걱정 끼쳐 드리는 거 싫어한단 말이야.”

정원이 말에 엄마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더니 기어이 정원이가 걱정하던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휘유~, 어떻게 키웠기에 남의 자식들은 다들 그렇게 효자지?”

정원이가 “엄만, 그럼 난 불효란 말이야?”하며 펄쩍 뛰자 엄만 “그래그래 알았어, 일단 취소! 조금 더 키워보고.”하며 항복했다.

“정원아, 너 다섯 살 때 다니던 유아원, 원장 선생님 생각나니? 몸이 좀 둥실둥실하셨지. 엄마는 그 선생님을 잊지 못한단다. 내가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한다고 유아원 입구 계단을 경사로로 바꿔 주셨잖니. 또 ‘엄마랑 아이랑 함께하는 달리기 대회’ 때면 늘 엄마 대신 너랑 같이 달려 주셨고. 뭐, 그 바람에 네가 한번도 일등을 못하긴 했지만….”

장난 끼 섞인 엄마 말을 들으니 정원이도 그때 생각이 났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원장 선생님 손을 잡고 뛰던 달리기 대회! 정원이는 그 날 정현이 어머니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 수화란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것이다.

<작은 세상>의 작가 최현숙은 첫돌 지나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을 졸업하며 시를 접었다가 2002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2005년 구상솟대문학상 본상(시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동화작가·콘티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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