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우리집 형편은 조금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작은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었기에 큰언니 월급에다 엄마의 신통찮은 벌이에 의존해야 했던 살림살이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장 셋방을 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살림살이었지만 엄마의 수양언니(정확하게는 외할머니의 수양딸)가 자신의 13평 아파트를 내주는 바람에 작은 집도 생겼다. 수양이모는 딸 하나를 둔 청상과부였는데, 일년의 대부분을 시집 간 딸네 집에서 보내거나 절에서 지내는 탓에 집을 거의 비워두고 있던 터에 마침 어려워진 우리집 형편에 대해 듣고 저렴한 비용을 내고 들어와 살라는 제안을 했었다(이는 아마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전에 쌓은 공덕 때문이리라). 수양이모의 세간 때문에 우리 일곱 식구가 살기에는 상당히 좁았지만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주인집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우리 식구만의 공간이 생겨 뛸 뜻이 기뻤다.

문제는 통학이었다. 아파트가 있던 암사동에서 사근동 학교까지 가려면 버스로 30분은 족히 걸려야 했다. 엄마는 내 통학 문제가 마음에 걸려 처음에 수양이모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우리 식구 모두가 숨통 트고 살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마당에 내가 걸림돌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엄마를 설득했다. 버스 타고 학교에 다녀보겠다고. 학교가 가까운데다 늘 뒷문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버스 사정이 지금만 같다면야 목발 짚는 내게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으련만 당시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기에 엄마는 계속 망설였다. 결국 엄마의 마음이 움직였다. 내심 20년 넘게 살아온 땅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엄마는 드디어 새로운 곳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그곳 사근동에서는 과거와 체면에 연연하기 쉽기에 다시 시작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버스 통학은 만만치 않았다. 그때 암사동에서 학교까지 가는 버스는 한대뿐이었는데, 그것도 배차간격이 긴 데다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같은 만원버스였다. 아침에 버스를 탈 때에는 종점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일찍 집을 나서야 했으며 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리려면 몇 정거장 앞에서부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문 앞에 나가 있어야 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가지 못해 내릴 곳에서 내리지 못하고 정거장을 지나쳐 내렸다가 다시 거슬러올라간 적도 많았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갈 때 버스 타기는 더욱 힘들었다. 이미 시내에서 잔뜩 손님을 태우고 온 버스가 아예 문도 안 열어주거나 문을 열어주어도 다른 사람들만 태우고 달아나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버스 안내양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 “집에나 있지, 왜 돌아다니느냐?”는 말이었다. 나는 오로지 버스를 타겠다는 일념하에 안내양들의 그런 말에 한번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니, 대꾸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자 나중에는 버스 기사들이 대신 그렇게 말했으며, 그들뿐 아니라 다들 그런 말을 했으니까. 말로 직접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으로라도.

버스 통학에 익숙해지기까지 한 한기 정도는 걸렸던 것 같다. 몸살 앓기를 밥 먹듯 하고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수업시간에 졸면서도 나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몸은 고달파도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새로운 묘미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이 사회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부딪치면서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커다란 성과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내 힘으로 깨뜨려 나가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집에만 있어야 하겠구나!’

우리 형제들은 저녁 때 모이기만 하면 학교와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버스 통학으로 인해 활동영역이 조금 늘어난 나도 그 가운데 한몫 할 수 있는 건수가 늘어났다. 예전에는 주로 언니들의 얘기를 듣는 축이었는데,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지니 할 얘기도 많아졌다. 물론 나는 언니들에 비해 억울한 경험담이 더 많았다. 버스에 올라타려고 안내양이 떠j밀어서 넘어져 죽을 뻔한 이야기, 자리가 없어 버스 안에서 30분도 넘게 서서 시달려야 했던 이야기, 자리가 났는데도 느닷없이 달려와 가로챈 아줌마 이야기 등... 그때마다 나보다 더 분노하는 엄마와 형제들 덕분에 나는 어느새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이어 담임과 사장에 대한 흉이 대부분이었고 버스 안내양이나 연예인 흉내, 그리고 억울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우리집에는 어느새 웃음꽃이 활짝 피곤 했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이 오순도순 모여 낄낄거리고 수다 떨면서 서로를 지지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한몫 거들면서 참으로 소박하게 행복해했으며, 우리 형제들은 서로간의 경험을 공유하고 지지하며 사회성을 길러나갔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 버스 타고 학교 다니겠다고 모험을 시도하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에 해당하는 대중교통 수단 이용을 위해서 나는 너무 큰 고통을 감내했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 위해 ‘왜 돌아다니느냐’는 언어폭력과 승차거부, 그리고 목숨에 대한 위협까지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는 탓이다. 고통에 대한 대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시는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수단으로부터 배제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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